<행복의 조건>
21. 돈이 최고의 가치
배정환
집에 돌아온 은지는 딸 수민이 방을 찾았다. 먼저 들어온 태성이 딸을 재우다 같이 잠이 든 모양이다. 아빠의 팔베개에 누워 잠든 딸을 보고 있노라니 남편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엄마의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감사한 마음을 앞섰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어두운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길 건너 낮은 주택가를 바라봤다. 환하게 불이 켜진 집들 속에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가족들과 시간을 갖지 못하면서까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은지는 어려서부터 가난했다. 공사현장에서 추락해 척추를 심하게 다친 아빠는 누워지내야 했다. 엄마는 일찍부터 수입 전선에 뛰어들었다. 은지는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 언니를 대신해 아버지 병간호를 도맡았다. 엄마는 언니에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가야 한다고 했다. 대학이 벼슬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엄마와 은지의 몫이 되었다. 그나마 엄마가 늦게 들오는 날은 모두 은지가 도맡아야 했다.
"은지야. 너도 고등학교 가면 공부 열심히 하게 해줄게. 언니부터 마음껏 공부하게 해주자."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은지는 아빠와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남자라고는 아버지밖에 없었지만 단칸방에서 함께 지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픈 아버지가 집에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자 집에서 옷 갈아입는 것까지 신경 쓰였다. 엄마는 바빴고, 나이차 나는 언니는 학교밖에 몰랐다. 친구들과 어울리다가도 아빠 식사와 약을 챙기러 집에 일찍 들어왔다. 혼자 라면을 끓여 먹으며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은지를 효녀라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은지는 그런 시선이 더 싫었다. 아버지에게 효심을 다하는 건 자신의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삶을 선택할 여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당하는 피해였다. 오랜 시간 아버지와 지냈지만, 아버지가 애틋하거나 불쌍하지도 않았다. 그냥 가족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무능한 남자의 표상일 뿐이었다.
"아빠... 난 아빠 같은 사람과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
잠든 아버지 앞에서 원망의 말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왜 그렇게 언니는 공부도 잘하는지… 언니는 엄마가 기대한 대로 서울 유명 대학에 입학했다. 등록금 때문에 은지는 상업고를 가야 했다. 꼭 대학을 가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언니 때문에 양보해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대학 생활에 바빠진 언니를 보면 심술이 생기곤 했다.
은지가 고등학생이 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 듯했다. 단칸방은 여전했지만, 여자만 있는 집이라 자유로웠다. 아버지를 미워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한 사랑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부재의 아쉬움보다 자유로움이 좋았다.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입 밖에는 내지 못했다. 엄마가 들으면 많이 섭섭해할지도 몰랐다.
고등학교 3학년, 아르바이트를 하던 은지의 핸드폰이 울렸다. 겨울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11월, 친구들은 첫눈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지는 첫눈 소식을 대신해 은행 입사 축하 메시지를 들었다. 돈을 만지는 곳으로 들어갔으니 얼마든지 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은지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언니도 대학 졸업반이 되어 대기업에 취직했다. 이제 엄마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잠든 채로 딸들과 이별했다. 아빠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한 엄마는 너무나 허무하게 떠났다. 일만 하다가 떠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은지야. 결혼하지 말고 언니랑 둘이 살자."
엄마 장례식에 함께한 맹세는 어디 가고, 언니는 형부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은행을 다니면서 작은방을 얻어 혼자 지냈다. 월급의 반 이상을 저축하고 모았다. 은지 이름으로 된 아파트 하나 가져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아끼며 살았다.
캔맥주를 하나 따고 창문을 열었다. 어둠이 온 도시를 감쌌다. 가로등 불빛에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가 보였다. 그 뒤에 검은 아파트가 은지의 시야를 가렸다. 높고도 높은 아파트는 집어삼킬 듯 은지의 작은방을 내려보고 있었다.
'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겠지?'
아파트에 비하면 자신의 방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래도 단칸방에 모여 살던 때가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스칠 때 머리를 흔들었다. 그 시절은 이제 은지의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다.
8년이 지났고 이제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전에 살던 곳과 비슷한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곳에 왔는데 여전히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갈 때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가을바람 때문인지 이름 모를 외로움 때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