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룰
수영장에서 수영모를 꼭 써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한다.
'수질관리'를 위해서
100여 미터 수영을 하던 중 누군가 툭 하고 손을 낚아챘다.
"수영모를 쓰셔야 하는데요"
(나는 소위 민머리로 머리카락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수영을 아주 오랫동안 했지만 수영모를 써야 한다는 말은 머리를 밀고 살아간 이후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규정이라 꼭 쓰셔야 해요. 빌려드릴까요?"
"아니요. 나갈게요"
사실 수영모를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왜 해야 하는지 모르면서 해야만 하는 일들"에 작은 항의를 하기 위함이었다.
프런트에 항의했다.
"제가 수영모를 안 썼다고 저지를 당해서......
그런데 저는 머리카락보다 수염이 더 길어요. 수영모를 써야 하는 규정이 있다면 '수염모'를 써야 하는 규정도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요? 제 수염은 비누로만 대충 씻어내기 때문에 수질에 심각한 오염을 초래할 수도 있거든요"
집으로 돌아왔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점장이라고 자신을 (나중에 물어보니) 밝힌 남자가 민원에 대한 답변을 하겠다고 했다.
"수질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수영모를 쓰는 것은 홍보에 있어 아주 중요한 규정입니다."
"네?"
남자가 비장하게 말했다.
"깨끗한 수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영모'를 꼭 착용한 회원만 입장이 허가된다는 홍보를 하지 않는다면 회원 유치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은 분이라고 할지라도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수염모에 대해서는... 아직 그런 것이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수염을 기른 사람들도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만 그분들을 제지하자면 큰 혼란을 발생시킬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염을 기른 분들은 수질에 심각한 오염을 초래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사실 어떤 답변이 돌아올지 뻔하게 알고 있었다. 오늘따라 팔 움직임이 불편해서 일찍 돌아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하고 싶었다.
"충분한 이유가 없는데 왜 그렇게 해야만 하죠?"
"왜 해야 하는지 모르면서 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한 의문은 살아오면서 줄기차게 질문하던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일일이 열거하려면 3박 4일쯤 걸리는 이유 없는 '의무'조항들 중의 하나를 심각한 어조로 말하는 남자에게 '제러미 리프킨'님의 한 마디를 전하고 싶었다.
"자동화와 리엔지니어링은 이미 광범위한 서비스 관련 분야의 노동력들을 대체하고 있다. 새로운 지능 기계는 현재 인간에 의해서 수행되고 있는 다수의 정신적 과업들을 수행할 수 있다."
차라리 기계였다면 이런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저 사람은 머리가 없으니 수영모가 없어도 수질을 오염시킬 어떤 요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수영모 착용에 대한 규정에 대한 예외를 적용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수영모 없이 입장시켜도 좋다."
그러나! 민머리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인 '수영모 없이 수영장 입장'허가를 받아내려고 기계의 판단이 인간보다 더 낫다고 하는 건 온전히 나의 편의를 위한 발상일 뿐이다.
비록 인간이 운전을 하면 자동화 기계보다 사고를 더 많이 내고, 인공지능 판사의 법적 판단에는 오류가 거의 없으며, 암 진단엔 따라올 인간 의사가 하나도 없는 세상이 오더라도 기계가 출입 여부를 판단하는 세상에 살기는 싫다. 적어도 눈을 마주치고 민머리의 장, 단점과 수영장 노동의 팍팍함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인간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유지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가 모조리 먹어치울 세상이 오기 전에 "왜 하는지 모르면서 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한 사려 깊은 고민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노동의 시절에 살 적에"라고 백 년 후쯤 후대의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선대의 사람들이 의식의 전환을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다... 등등의 말이라도 듣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