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욕망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의 욕망

by 이야기공간 낄낄

[파트 1] 김 부장의 해방 일지



드라마 <김 부장...>이 막을 내렸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 임원 승진과 아들의 대학 간판에 목을 매던 김 부장의 이야기는 간명했다. 평생을 경쟁의 최전선에서 살던 그가 처절한 패배 끝에 비로소 '진짜 삶'과 마주하는 서사.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도록 부추기는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수법과 달랐다.


성공담도, 실패 후 성공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묻는다.

아파트 값이나 명함의 무게가 우리 존재를 증명하는가? 우리가 그토록 사소한 존재인가?


시청 뒷맛이 개운했다. 한국 사회 깊이 뿌리 박힌 천민자본주의에 건네는 소박한 '고별인사'.


원작이 자본주의의 생리를 다룬 소프트한 경제 소설이었다면, 드라마는 자본주의를 세탁한 듯한 순수함이 있었다. 더욱이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자아의 의미'를 뻥치지 않아 더 좋았다.


이야기의 핵심은 '삶에 대한 부당한 부채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존재란 모름지기 그 자체로 미지의 영역인데, 왜 태어남과 동시에 목적과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가?"라는 부당함에 대한 시위.


내 인생 역시 그 시위의 의미를 하나씩 체득해 가는 과정이었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방정식을 잘 풀어내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공포, 그 집단무의식으로부터의 탈출.


성공과 실패는 세상의 이치에 따른 결과일 뿐, 존재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그 사이의 공백, 즉 '아무 가치 없음'을 직시하고, 존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각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혐오하는 것들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삶의 의지다.


최종회에 김 부장이 아내와 밤 산책 중 나오는 대화가 이 드라마를 압축한다.


"나 그 부동산 인수 포기할래. 권리금을 주면서까지 하고 싶지 않아.

혼자 힘으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게 내 방식이야."


드라마 <김 부장>은 정서적으로 꽤 마음애 들었다. 공장의 정리해고 명단을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본인이 명예퇴직을 선택하는 장면, 아파트를 과감히 팔아버리고 빚으로 부터 해방되는 장면, 회사 임원의 껄끄러운 제안을 물리치는 장면 등 삶이 주인공을 이끄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갑작스레 '르네 지라르' 선생이 떠올랐다.

성인이 된 이후 굳어 버린 머리 속에 윤활유를 부어주었던 그의 저서 '문화의 기원'


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

현대사회의 '경전'으로 꼽혀도 손색 없다.


[파트 2] 지라르 선생의 모방과 희생양

요즘은 욕망조차 온전히 내 것이 아니다. 소비하는 물건부터 동경하는 삶의 양식까지, 우리는 서로 무섭도록 닮아 있다. 도플갱어의 세상도 아닌데 내밀한 욕망에조차 '표준'이 존재하고, 정의를 논하는 시각마저 '국룰'이라는 틀에 갇힌다.


참으로 지루한 시대다.

역사는 늘 '다름'을 통해 진보해 왔건만, 지금은 초록도 빨강도 모두 '동색'으로 수렴된다.


일찍이 '르네 지라르'는 정확히 보았다. 인간의 욕망은 자율적이지 않다. 우리는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모방함으로써 그것을 원하게 된다. '모방 욕망'이다.


비극은 이 욕망이 중첩될 때 시작된다. 다수가 같은 대상을 욕망하면 경쟁은 피할 수 없고, 긴장은 한계점을 향해 치닫는다. 이때 집단은 폭발 직전의 에너지를 해소할 출구를 찾는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이유는 만들어진다) 누군가가 '희생양'으로 지목된다. 지라르는 이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 명명했다. 고대 사회가 내부의 폭력성을 희생양에게 전가하며 안정을 찾았듯, 경쟁과 비교심리에서 오는 폭력성을 은폐하기에 급급해 왔다는 문명 해석.


이 메커니즘은 현대 사회, 특히 디지털 세계에서 더 정교하게 반복된다. 인스타그램 속 끝없는 모방, 그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경쟁심은 결국 조리돌림, 여론 재판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배출된다. 희생양의 공급이 대중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 되고, 결국엔 탈이 나게 되어 있다.


애당초 내가 잘할 수 없는 영역은 욕망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이는 메타인지와 같은 지적 능력이 없어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내 주제는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트렌드의 최상단에 있는 것들이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면 미련 없이 벗어던져야 한다. 나아가 '잘하고 싶다'는 갈증조차 욕망할 필요가 없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내 능력을 벗어난 일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진짜 '잘함'의 정의는 타인의 인정이나 성적표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롯이 내면의 만족, 나만이 내릴 수 있는 평가의 영역이다. 타인의 욕망을 걷어낸 자리,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자유롭다.


결론

'자유'의 의미는 '부당함'으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잘 되어야 한다는 부당함으로부터의 탈출.


부담감을 갖지 않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이며,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이유다.


인간은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못하는 것은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면 되니까. 그리고 뭘 잘한다고 으스댈 필요도 없다. 재능도 노력도 전부 자연스럽게 발화되는 세상의 특징이다. 진짜 별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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