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은 재난, 입은 죄악, 회사는 지옥
사적인 사정을 너무 쉽게 묻는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여도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고 회사 안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사람들, 너무나 당연하게 가족, 연애, 결혼에 관해 묻는다.
차라리 ‘나’에 대한 질문이면 직장동료에 대한 순수한 관심-전혀 달갑지 않지만-으로 포장해보기라도 할 텐데 부모님이 몇 살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왜 없는지 따위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화 주제로 던지는 사람들을 마주하면 환멸이 날 지경이었다.
더 말해보자면, 난 누가 내 취미가 뭔지, 주말에 뭐 했는지 물어보는 건 상관이 없다. 기꺼이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주말에 이런 거 했어요’라고 하는 순간 내 허락은 구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야기 씨는 주말에 그거 했대’라고 하는 게 문제다. 겨우 그 정도로? 하며 예민한 인간 취급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합의되지 않은 사적인 이야기가-주제의 경중과 상관없이- 떠돌아다니는 걸 어떻게 기꺼운 마음으로 넘어간단 말인가.
내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알지도 못하고, 시스젠더 헤테로 외에는 고려하지 않은 남자친구 유무는 그만 대답하고 싶다. 설령 내가 그렇다 하더라도 연애가 삶의 필수 요소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만나지 않느냐니, 따위의 질문은 집어치웠으면.
가족도 그렇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상 가족’의 틀에 맞춰서 부모님의 나이와 직업을 묻는다. 가족 구성원이 엄마와 동생인 나에게 말이다. 그들의 질문은 한 부모 가정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가족 형태를 배제한 무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설령 그들이 생각하는 정상 가족이라 하더라도 그걸 왜 대답해야 하는가.
물론 그때의 난 거리낄 것이 없었고 숨기고 싶지도 않았기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안 계신다고, 돌아가셨다고. 그런데 뒤이은 질문은 무례함을 넘어 황당할 지경이었다.
몇 살 때 돌아가셨니? 어쩌다 돌아가셨니? 어머니가 고생이 많으셨겠네-
진심으로 궁금하다. 이 사람들 왜 이러는지. 이쯤 되어서도 원래 사회생활이 그런 거지-라던가 싫으면 말을 돌리면 되잖아? 하는 공감 능력 또는 기초적인 윤리 의식이 결여된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영원히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소문은 형체가 없지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모르는 사이에 불투명한 시선이 덧씌워지고 그 위로 한 사람을 판단한다. 정황은 살피지 않는 편견이 누군가를 좀 먹을 수 있다는 건 신경 쓰지 않으면서.
안다. 사람은 직접 겪어봐야 안다는 말과 괜히 그런 말이 돌지 않는다는 말 사이에서 방황할 수 있다는 거. 하지만 ‘싸가지 없다’는 말은 젊은 여성에게만 쉽게 붙는 걸 보며 같은 행동도 아주 쉽게 왜곡될 수 있음을 체감해야 했다. 그에 반해 분명히 존재했던 남성의 성추행이 ‘소문’으로만 스러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던 것도. 이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주요하게 다루겠다.
언어는 수백 번 다시 태어난다. 축복이기도 하고 재앙이기도 하다. 모두가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흘린 몇 마디가 누군가에게 끝나지 않는 재난이 되기도 한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