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하지 않은 작가가 독자를 실감하는 순간
과거 자주 본 뮤지컬 넘버 중 이런 가사가 있다.
거기에 있나요 / 시간 좀 내주세요
(…) 당신을 느낄 수 있게 제발 / 보여줘 당신의 존재를 / 날 위해
-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 OST ‘Are you there’ 중
본래 넘버는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에 분투하는 두 청소년이 신을 찾아 외치는 장면이지만 나는 문득 이 가사가 독자를 향한 창작자의 호소처럼 느껴졌다.(당연히 뮤지컬 내용은 이와 전혀 무관하다)
독자의 존재를 가장 일차적으로 실감하는 창구는 작품 댓글창이다. 작품 전체에 관한 감상이 주인 단행본과 달리 유료 연재는 편당 내용에 따라 반응이 그때그때 나뉜다.
누군가는 ‘악플 같은 건 어떡해?’라며 걱정을 표하기도 하지만, 작가 경력 4년 차로서 속단하자면 댓글이 적은 작품, 즉 조회 수가 낮은 작품은 그나마 호평 위주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취향에 맞는 정말 극소수의 독자만이 이야기에 동행해 주고 있는 덕분이다.
‘그래도 좋은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든다면 ‘댓글 1000개의 별점 4.5’ 식당과 ‘댓글 4개의 별점 5’ 식당 중 어디서 밥을 먹고 싶은지 다시 물어보겠다. 물론 ‘댓글 5개의 별점 2.8’보단 낫겠지만…….(이 디테일한 수치는 절대 단순 예시가 아니다)
물론 댓글 수가 작품의 완성도 혹은 매출과 반드시 비례하진 않는다. ‘내용이 재밌으면 댓글이 많이 달린다’가 정론이긴 하지만 작품 성향과 프로모션 종류, 심지어 출시한 플랫폼에 따라 댓글 수가 유의미하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마냥 통통 튀고 밝은 내용보단 분통을 터트리는 자극적인 전개가, 런칭 직후 플랫폼에 노출이 많이 되는 상위 프로모션을 받은 작품이 댓글이 많다. 플랫폼에 따른 차이는 이용자 성향과 플랫폼 자체의 성격이 큰 영향을 미친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카카페: 3사 중 이용자 수가 가장 많은 만큼 댓글 역시 많다.
2) 시리즈: 네이버 계열. 댓글을 쓰면 닉네임과 함께 아이디 일부가 노출 되는데, 네이버 아이디는 ‘현생’과 연결되므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들이 많다.
3) 리디: 댓글을 남기면 포인트를 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하여 댓글 수 자체는 적지 않으나, 글을 실제로 읽지 않은 이들의 무의미한 내용이 많다. ex) 재밌어요. 정말 기대되네요. 키워드가 마음에 들어 잘 읽고 있어요^^
댓글 외에도 SNS를 포함한 각종 커뮤니티로도 감상평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으며-대개 표현이 훨씬 적나라하다- 간혹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 혹은 SNS 계정으로 독자가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몹시 드물기는 하지만, 메시지는 댓글창이나 커뮤니티보다 훨씬 독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감각을 준다.
그 감각을 알게 됐다면, 절대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만둬야 할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만 써야 할 이유는 많았고 계속 써야 할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내 마음. 내가 쓰기를 지독히도 원하기에, 쓰지 않고선 못 배기기에.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돈도 안 되는 짓을 꿋꿋이 써나갔다. ‘될 거야’라는 강렬한 확신은 없었다. 다만 ‘이렇게 하다 보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라는 주술적 염원을 품고 있었을 뿐.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엄마는 내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물었다. 나는 어설프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면서도 제대로 된 반박은 하지 못했다. 다만 화가 나서, 하고많은 날 중 생일에 그런 말을 내뱉은 무심함에 치를 떨며 집을 나섰다.
공기는 건조하고 온도는 낮았다. 늦은 저녁, 나는 패딩에 몸을 파묻은 채로 쿵쿵거리며 공원을 걸었다. 걷고 걸었다. 사실 엄마의 말이, 그 경위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욱 서러워졌다.
당시 내겐 미래를 낙관할 징조가 전혀 없었으니까. 작품 종수는 쌓여갔지만 가망은 영 보이지 않았고, 인세를 시급으로 환산한다면 100원이 될까 말까였다.
그런데도 계속 썼다. 차기작을 구상하고 투고를 돌리고 이런저런 출판사와 계약했다. 단권과 장편 연재를, 현대 로맨스와 로맨스 판타지를, 전연령과 19금을 부지런히 오가며 글을 썼다. 내 장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무엇 하나라도 걸리길 바랐다. 어느 한 영역에 비범한 재주가 발견된다면 그런 장르를, 내용을, 캐릭터를 밀고 나갈 작정이었다.
애석하게도 모든 번뇌와 고민이 해결되는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역시 나는 약 1시간 30분의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고민을 품고서, 다만 몸을 움직여 조금 개운한 마음으로. 산책을 한 덕택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그간 애써 묻어둔- 그리고 엄마의 말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고민은 다시 수그러들지 않았다.
진짜 그만해야 하나. 지금이라도 새로운 길을 알아봐야 하나. 사회에서 아직 어리다고 해줄 때, 전 직장과는 다른 곳으로, 청소년 때부터 열심히 딴 자격증 18개를 써먹을 만한 조직에 들어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앞으로 몇 년은 젊음을 방패 삼아 애써 보고 싶었다. 그 몇 년이 전부 헛발질이 될까 불안하면서도 그러고 싶었다.
한 독자의 메시지는 그때 발견했다. 이불에 누워 한창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던 때, 트위터 작가 계정의 DM에서.
그분은 내가 데뷔하기 전 쓴 팬픽부터 읽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너무 좋아했고, 내 글로 인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새로이 배웠으며 그런 글을 써줘서 고맙다고 했다. 애정과 정성으로 빼곡히 채워진 장문의 메시지를 읽으며, 전신을 점령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쓰자.
계속 쓰자.
타이밍이 공교로웠을 뿐 이런 마음을 직접 남겨 주는 분들은 이후로도 간간이 있었다. 빈도를 헤아리자면 1년에 1번 정도로 띄엄띄엄이라도 벅찰 만큼 좋다.
어떤 분은 내가 롤모델이라고 했고, 어떤 분은 앞으로도 계속 작품을 내달라 간청했으며, 작품 주인공들을 손수 그려 게시하신 분도 있었다.
작가와 독자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소통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는다. 나 역시 그 의견에 일부 동의하나 이런- 지극히 사적이고 애정 어린 표현을 어떻게 마다할 수 있을까. 아니, 마다하고 말고가 아니라 마음 같아선 ‘여러분 감상 좀 주세요. 여러분의 메시지가 한 작가를 살립니다, 엉엉’하고 애걸이라고 하고 싶다. 그랬다간 몇 없는 독자마저 떨어져 나갈까 자중할 뿐이지.
독자 한 명, 한 명의 목소리에 일희일비하란 의미가 아니다. 다만 쓰는 내가 읽는 당신(들), 내게 ‘재밌다’는 철저히 주관적인 감상을 건넨 당신(들) 덕분에 고단하고 불안한 한 시절을 건너왔다고- 지금도 여전히 그 메시지에 기대어 쭉 쓰고 있노라고 이야기하고 싶기에.
이 글은 아마 닿지 못할 당신(들)에게 전하는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