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 사주, 신점으로 진로 허가 받기
회사가 싫었다. 발 디딜 여유 없이 빽빽한 전철도, 다음 날도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는 시각을 미루는 습관도, 사무실 공기에 녹아있는 차별과 비효율적인 관행까지 전부.
저 사람들처럼 나이 들고 싶진 않아, 하고 퇴사를 결심하자 만성적인 우울감이 거짓말처럼 줄어들었다. 그 빈자리엔 불안이 차지했다. 내 인생 K-오컬트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회사를 그만둬도 괜찮을까요, 이런 직업은 어떤가요, 외국에서 사는 운은 있나요, 글로 먹고 살 수 있을까요. 친구에게 소개받은 사람에게 카톡 사주를 보며 그런 질문을 쏟아냈다. 팬픽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내 힘으로 완성한 글은 몇 편 되지도 않으면서. 3만 원짜리 사주가 향후 50년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을 것처럼 간절히 물었다.
앞으로도 1년에 두어 번, 이런 질문을 반복하리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타로, 사주, 신점. 누구는 재미로 보고 누구는 재미로라도 보지 않는 것. 나는 과격한 맹신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믿는 쪽이었고 마음이 휘청거릴 때마다 5천 원에서 5만 원 사이를 지불하며 답을 얻으려 했다.
질문 단위로 금액이 책정되는 온라인 타로부터 5만원 을 내면 무한히 문답을 주고받을 수 있던 용하다는 법당까지. 타로와 사주, 신점 중 어떤 방식을 고를지, 수많은 사업자 중 누구 앞에 앉을지는 그때그때 달라졌다.
보통 당장 정답을 얻고 싶으면 타로, 한 해 길흉화복이 궁금할 때면 신점을 봤다. ‘누구에게 볼지’도 비슷한 맥락으로, 플랫폼에 매겨진 별점과 평점이 기준이기도 친구의 지인의 직장 동료…… 의 추천이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내 초유의 관심사는 하나. ‘글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 먹고 살 수 있을까요?’ 였다.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때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내 앞날을 보장받으려 했다.
78장의 카드, 생년월일시로 나오는 팔자, 보이지 않는 신령님 그 무엇이든 좋았다. 글을 계속 써도 된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네 한 몸 건사할 수 있을 거라고 단호히 예언하길 바랐다.
당연하지만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해서 항상 같은 답이 나오진 않았다. 어디서는 내게 예술적인 운이 없다고 했고, 어디서는 전형적인 예술가 사주라고 했다. 의성의 모 애동제자는 글은 취미로만 삼으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파주의 모 무당은 평생 써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심지어 같은 무당이 몇 달 간격으로 정반대의 조언을 남긴 적도 있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나는 지금 헛발질을 하는 중일 수도, 열심히 내 그릇을 채워가는 중일 수도 있었다. 신앙이라는 게 대개 그렇지만, 한 마디로 믿기 나름이라는 의미다.
어떤 말을 믿을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 질문을 끊임없이 했을 때부터, 내가 듣고 싶은 답은- 믿으려고 작정한 답은 하나였으니까.
‘소설가는 불안정하니까 취미로만 써야지. 잘되면 진짜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으니까 본업은 따로 있어야겠지’ 하며 다른 진로를 모색하던 시기조차 상담 말미에는 ‘그런데…… 글을 쓰는 건 어떤가요?’하고 무심한 척 덧붙였다.
얼마 전 다시 읽은 20대 초반의 일기장에는 당시 사주인지 신점인지에서 들은 내용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진로가 나한테 맞을지, 독립은 언제 할 수 있을지 따위의 답을 적어둔 항목 맨 아래에는 ‘소설’ 두 글자에 동그라미 여러 겹이 그려져 있었다.
완전히 잊고 말았지만 나는 앞날에 전전긍긍하며 쓰기를 미뤄뒀던 시절조차 쓰기를 열망했다. 카드의, 팔자의, 신의 권위를 빌려 가능성을 점쳤다. 쓰기가 내 운명이니 믿고 가라는 확신을 얻고 싶어 끊임없이 안도하거나 실망했다.
어떤 역술인의 말마따나 2027년에 정말 운이 트일지 아닐지, 혹 작가로는 영 글러 먹을지는 아직 모른다. ‘지금은 괜찮은데 나이 들어서는 좀’과 ‘작가가 천직인데? 직업 잘 골랐네요’ 중 후자를 골라 믿기로 했으니까.
내 마음대로, 고집스럽게. 장담할 수 있는 건 언제 바뀔지 모르는 그 마음 하나가 전부다.
앞으로도 계속 쓰면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