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와 코치(Coach)_上

외로워도 슬퍼도 참고 참고 또 참는 캔디는 없다

by 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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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렸을 때부터 눈치가 없었다. 남들이 뭐라 하던 내 갈 길만 가는 기질 때문인지, 문장이 엮인 세상에 익숙해져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아이들에게는 기본으로 쥐여주는 장비가 나에겐 없었다. 아니면 없는 게 나을 정도로 허접했거나.


혼자 행동하는 걸 좋아하고 나만의 세계가 뚜렷하긴 했지만, 그게 또래와의 관계에서 무감하게 굴 수 있단 뜻은 아니었다. 나는 친구의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는 평범하게 여린 사람이었고, 중학생 때 친구가 ‘너 진짜 눈치 없네.’라고 말한 후 나의 행동을 두 번 세 번 되짚게 되었다. 그게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로 옮겨진 건 아니었지만. ‘민폐는 되지 말자’는 신념은 점점 비대해졌다.


눈치는 회사에서도 나를 따라다녔다. 멋모르던 열넷처럼 발전이 없단 말이 아니다.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어린 신입 여직원’에게 요구하는 업무 외적인 역할이 있었고, 나는 그 책임을 단 1%도 수행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게 수많은, 온건하고 조심스러우며 무례한 코치(Coach)의 이유였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아주 간단한 일들이다. 30분 일찍 출근해 컵을 씻고 얼음을 채우고 차 티백과 커피믹스를 꺼내두어 탕비실을 정돈하고, 관리자의 기호에 맞는 신물을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 간식 시간에 치킨과 피자 상자를 열어두고 음료수를 일일이 따르며 다 먹은 후 말끔하게 뒷정리를 하는 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며, 내가 안 할 이유는 없는 일이다. 동시에, ‘누구라도 할 수 있으며 나만이 할 필요는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다시. 사근사근하게 웃고 매사에 친절이 답하며 먼저 싹싹하게 말을 걸어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치는 것. 나도 친절을 좋아한다.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을 싫어할 만큼 속이 꼬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면 좋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어린 여성 직원에게 의무가 되어버린, 이 과업을 지키고 싶지 않았다.

‘사회생활 할 땐 좀 웃으면서, 마음을 열고-’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신입이어서? 어려서? 보이는 성별 때문에? 모든 것이 짜 맞춰진 기대였겠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 선배들이 지겹게 수행하는 업무였으며 동갑내기 남자 동기들은 듣지 않는 지점에서 구태여 더 추측하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은 미소가 아닌 무(無)표정이 기본값이다. 굳이 덧붙일 필요 없이 당연한 명제인데 왜 많은 사람이 ‘미소가 아름다운’ 여성을 찾는 걸까.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울고 참다가 웃으면서 푸른 들을 달리는 캔디를 보통의 여성상으로 둔 것일까?


나는 성격 좋고 일을 못하는 동료보다는 무뚝뚝하고 일을 잘하는 동료가 좋다. 하지만 실제로 매겨지는 성과는 가시적인 수치가 아닌 ‘얼마나 잘 보였는지’가 핵심이었다. (내가 직접 겪지는 않았다. 처음에 고졸로 시작한 급수는 연차 순대로 등급이 매겨진다)


지각이 잦아도, 크고 작은 실수를 해도 관리자가 눈 감고 덮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하물며 고만고만한 연차의 하급자들이니 얼마나 쉽겠는가.


‘일 잘하는 것보다는 주위 관계가 중요해’라는 말이 당연하게 수용되는 조직이 과연 건강한 상태일까? 일만 잘하면 끝이야, 라고 곡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도리를 지키는 이상의 요구를 씌워버리는 것을 폭력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아서, 딱딱하게 대답을 해서- 행위 그 자체가 아닌 젊은 여성이 사근사근하지 않아서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라면, 나는 거꾸로 묻고 싶다. 나이 든 남성이 이처럼 행동해도 똑같이 지탄할 거냐고. 그 경우랑 같냐고 묻는다면, 그럼 무엇이 달라야 하냐고.


월급을 받아도 갑절을 받는 건 그분들이실 텐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근로계약서에 ‘미소와 친절, 솔 톤의 어조’가 들어가기라도 했었나?


민원 상담 위주의 업무를 했을 때도, 관리자와 민원인 모두 나에게 상냥함이 업무의 주된 역량인 것처럼 요구했다. 하지만 내가 웃으며 제도와 방법을 설명해주는 것보다, 중년의 남성 상사가 단정적으로 매듭짓는 한 마디가 훨씬 효과적이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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