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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송이 Mar 15. 2021

절취 노트 같은삶도 아름답다.

 내가 어느덧 이 직업을 가지고 다닌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사람 사는 인생이 다 그런 걸 지도 모르겠으나 주말만 빼면 사실 안 힘든 날이 없고,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다. 본인의 경력을 위해서 이리저리 직장을 옮겨 다닌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사실 내가 이 직업을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싶은 때도 정말 많았다. 오늘도 나가고 싶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며 출근을 하고 있노라면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게 될까를 고민한다. 오늘은 출근한 뒤에 책상을 정리하고 있다가 책상 위에 온갖 낙서가 되어 있는 내 절취 노트를 발견하고 나서는 다시 새로운 것을 기록하기 위해서 종이를 찢었다.

 절취 노트는 참 기발한 물건이다. 어느 정도 글을 쓰고 나서 종이를 찢으면 다시 새 종이가 앞으로 나온다. 잠시 동안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을 적고 나서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찢어서 버린다. 그렇게 찢어서 쓰다가 다 쓰고 나면 버리면 된다.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쓰면 쓸수록 가벼워지니 좋고, 언제나 새 종이를 쓸 수 있어 좋다. 어지간해서는 버릴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문득 물건으로서의 유용함은 매우 높게 평가받지만 그게 인생이라면 얼마나 비참할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절취 노트.. 용어는 어렵지만 흔하게 쓰는 물건들 중 하나다. [출처:Pixabay-OpenClipart-Vectors]

 인생이 절취 노트와 같다면 물건으로서의 편리함이 정반대로 슬프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종이에 적은 내용들이 사람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땀을 흘리고 노력한 나의 과거도 새로운 현실 앞에는 전혀 답이 되지 못한다. 언제나 새로운 답을 찾아야 하고 기껏 찾는 답은 다시 쓸모없이 사라진다. 종이 자체를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꿈을 향해 달려가던 나의 길 끝은 그저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뿐이다. 희망을 품고 살았던 내 삶도 기껏 도착해보니 내가 너무 많이 닳아서 이를 즐길 새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절취 노트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와 내 직업의 관계가 참으로 절취 노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쓸한 마음으로 절취 노트에 글을 쓰기 위해 노트를 집어 든 순간에 손 끝에 절취 노트의 윗부분이 닿았다.

 절취 노트의 윗부분도 똑같은 종이다. 하지만 평생 쓸 일이 없는 종이이기도 하다. 윗부분 종이의 역할은 쓰는 사람이 노트를 찢기 전까지 아래쪽 노트를 잡아준다. 딱 그뿐이다. 절취선 아래쪽 노트가 찢어지고 나면 제 역할은 모두 다 한 것이고, 더 이상 쓸 일이 없다. 노트를 오래 쓰면 쓸수록 아랫부분에 있던 노트는 얇아지는데 윗부분에 남는 종이는 점점 두꺼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절취 노트의 윗부분 종이 조각은 누군가 노트를 집어 들 때 윗부분을 잡으며 얼마나 사용했는지 그 두께를 가늠할 수 있다. 내가 찢어져 나가는 절취 노트의 아랫부분을 보며 내 삶에 무엇이 남을까를 고민할 때 바로 그 윗부분이 나에게 해답을 알려주었다.

 매일매일 찢겨 나가는 절취 노트의 아랫부분처럼 정말 내 인생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 있다. 정말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이란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취 노트의 윗부분의 두께를 보면 누구라도 이 절취 노트가 얼마나 많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어떤 자리에서 오래 있었던 것 자체만으로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만큼은 남길 수 있다. 이것은 본인뿐 아니라 타인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삶의 기억인 셈이다.

나는 달렸고 시간은 흘렀다... [출처: Pixabay-Myriams-Fotos]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가끔씩 그들 부모님들에 대해서 물어볼 때가 있다.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부모님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이 필요 없이 이 분들이 대단한 부모님들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멋진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돈이 많은 부모님보다도 한 가지의 직장에서 20~30년을 보내셨던 부모님들이었다. 직접 본 적은 없어도 본인 삶의 3분의 1 이상을 오직 한 가지 직업으로 보내셨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존경심이 생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한 직장에 보낸 분들에게 있어 과거의 한 번의 성공이나 실패들은 거대한 바다에서 한 방울의 물방울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남들에게 꼭 잘 보일만큼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나의 경험이 반드시 가치가 있고 쓰임 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어디에 자랑하지 않아도 일부러 보이게 하지 않아도 쓰면 쓸수록 점점 남는 절취 노트의 윗부분처럼 그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다면 먼 훗날 그것이 훌륭한 삶이었음을 나와 주변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찢어버려야 할 하루일지라도 만들기 위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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