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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Aug 23. 2020

'이완'의 마력에 대처하는 요가 강사의 자세

'잘하려고 하지 마라', '너무 애쓰지 마라', '내려놓아라'... 이런 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말들은 주로 무언가를 수행해야 하는데 잘하고 싶은 마음에 조급함이 생기고, 몸은 긴장되어서 정작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듣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항상 "뭘 내려놓으라는 거죠? 어디까지 내려놓으라는 거죠? 어떻게 내려놓으라는 거죠?" 하고 따져 묻고 싶어 진다. 


이런 말을 뻔질나게 듣던 때가 있었다. 학부 때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나름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던 우리 극회가 100회 정기공연을 기념하여 동문 선배들이 참여하는 큰 규모의 공연을 기획했었다. 당시 연기 열정에 불타고 있던 나는 당연히 출연자로 작업에 참여하였고, 운이 좋게도(?) 대사가 아주 많은 비중 있는 역할에 캐스팅되었다. 그리고 악몽이 시작되었다. 


당시 프로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던 동문 선배이자 그 작품의 연출은 귀가 굉장히 예민한 분이었다. 연습을 할 때 배우들의 연기를 보기보다는 고개를 숙이고 대사만 들으며 코멘트를 하곤 했다. 대사 분량이 아주 많았던 나는 매 연습에서 주로 비평의 대상이 되곤 했는데 어떤 날은 하루 4시간 연습에 3시간 넘게 나 혼자만 연습을 한 날도 있을 정도였다. 내가 대사를 한 마디 하면, 연출이 "그게 아니야. 다시." 하고, 내가 그 대사를 다시 하면, "소리가 떴잖아. 다시." 하고, 그 대사를 또다시 하면, "아니라니까. 이 말이 무슨 뜻이야?" 하는 식으로 끝나지 않는 대사 연습이 매일 이어졌다. 


저렇게 방향을 알 수 없는 연습이 한참 진행되다 보면, 연출도 나도 그걸 보는 다른 이들도 모두 지치고, 그럴 때면 으레 들려오는 말이 있었다. 때로는 한심하다는 듯이, 때로는 위로랍시고, 때로는 내 문제를 분석해주겠다는 말투로...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네가 너무 애를 써서 그래."/"그냥 막 해."/"그 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아!" 

"..."


뭐라고? 잘하려고 하지 말라고? 그럼 난 여기서 왜 이런 수모를 겪어가며 고생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사실 당시에는 자존감이 너무 바닥을 치고 있어서 이런 불온한(?)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그저 '아, 내가 너무 애를 써서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지. 어떡하지. 모르겠는데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 매일 애태우고, 연습에 가서는 매번 연출에게 깨지는 나날의 반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로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다른 선배가 찾아왔다. 당시 연출보다도 훨씬 손위 선배인 분이었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서러운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연습을 참관하던 그 선배는 연출의 코멘트를 듣더니 몇 가지 첨언을 해 주었다. "방금 네가 말한 대사는 이러이러한 뜻이야. 그런데 네가 이렇게(내 발화를 따라 하며) 말했지. 이렇게 말하면 저러저러한 뜻으로 들려."라던지, "너 방금 이렇게(따라 하며) 말했는데, 어미가 살짝 올라갔지? 우리나라 말에서 기본적으로 어미를 올리는 경우는 의문문 밖에 없어. 네가 방금 말한 것처럼 어미를 애매하게 올리면 의문문도 아니고 네가 스스로 하는 말에 자신 없는 것처럼 들려. 그런데 네 캐릭터는 그런 인물이 아니야."와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아... 그제야 그간 연출이 수없이 외쳤던 "아니야"의 구체적인 뜻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어떻게 시도해볼 수 있을 지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알게 되었다. 연출이 그동안 수없이 "아니야"만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자신에게 배우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방법론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려놓으라"는 류의 말들도 일종의 처방이자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매 번은 아니지만, 나도 이런 말들에 반응해서 뭔가 더 나은 연기를 했던 날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내가 곱씹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되어 주기에는 너무 빈약했는데, 나는 그 원인이 문제 분석 단계에서부터 구체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가에도 비슷하게 모호한 말이 있다. "이완하세요." 수많은 요가 강사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이완하라는 말은 일견 명확한 듯하면서도 사실 굉장히 헷갈리는 말이다. 일단, 이완이 무엇인가? 그냥 힘을 빼는 것인가? 그럼 힘을 얼마큼 빼야 하는 것일까? 어깨를 이완하려면 어깨의 어느 부위에 힘을 빼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전에 어깨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지??? 등등


이완하라거나, 긴장을 풀라거나, 힘을 빼라는 류의 말들은 위와 같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질문들에 구체적으로 답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이상적인 목표 지점만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이완'은 일종의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지만, 그만큼 별 효능이 없는 설탕약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나 역시 수업을 할 때 이 '이완'이라는 만능열쇠의 마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회원이 아사나나 다른 동작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다가 발견하는 '문제점'들은 대개 몸의 어느 부분인가가 너무 긴장되어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이완하라는 말을 반복하게 된다. 


물론 이완하라는 말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한 마디에 자신이 습관적으로 긴장하는 부분을 알아채고 더 좋은 정렬로 가는 능력자들도 있다. 하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많다. 가장 난감한 상황 중 하나는 예전 연출과 나 사이의 실랑이가 수련생과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우이다. 불과 일주일 전에도 나는 한 수업에서 이런 상황을 겪었다. 그날 나와 수업한 회원은 앉아서 하는 자세에서 가슴을 너무 젖히고 허리를 조이며 앉아 있었다.


"등에 긴장을 풀어주세요."

회원은 상체에 모든 힘을 풀고 구부정하게 앉는다.

"등을 바르게 세워 볼까요."

회원은 다시 가슴을 젖히고 허리에 힘을 준다. 

"아... 다시 어깨를 이완하고 허리에 살짝 힘을 풀어 볼까요."

회원은 다시 구부정한 자세로 간다. 

"어.... 음.... 아.... 예..."


이와 같은 끝나지 않는 불통의 피드백 루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 '다른 길'에는 모범 답안이란 없다. '이완'이라는 만능열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다른 만능열쇠를 찾을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잠긴 문에만 꼭 들어맞는 열쇠를 찾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회원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불통 상황은 큐를 주는 강사와 그것을 듣고 무언가를 하는 회원 사이에, '이완'에 대한 개념과 그것을 실시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많은 경우 '긴장'과 '이완'을 서로 대립되는 반대의 상태로만 이해하지만, 실상 이 둘은 늘 스펙트럼 상의 어떠한 평형점에 공존한다. 바닥에 누워 죽은 듯이 몸을 풀어놓지 않는 이상 순도 100%에 가까운 이완으로 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이완하라는 주문은 지금과는 다른 긴장과 이완 사이의 평형점을 찾아보라는, 그 평형점에서는 자세가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지금 당신의 몸이 찾을 수 있는 최적의 정렬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회원에게 "지금과는 다른 긴장과 이완의 평형점을 찾으세요."하고 주문한다 한들 이 말이 제대로 먹힐 공산도 크지는 않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해서 나의 언어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회원이라면 다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지금까지 시도한 것과는 다른 방법론과 다른 언어를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위의 회원 같은 경우, 일단 몸을 바르게 세운 상태의 정렬로 가기 위해 자신의 몸이 어떤 식으로 힘을 써야 하는지를 모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등을 바르게 세워 앉는 것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올바른 정렬에 가까운 자세를 임의적으로 만들어 준 후 이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어디에 얼마만큼의 힘이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먼저 경험하게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등을 세우는 것이 등을 뒤로 조이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인지할 수 있는 정보를 줄 수도 있다.


어떤 정보를 어떻게 주느냐 역시 수많은 선택지들이 있다. 누군가는 "척추기립근이라는 이름이 마치 등을 세워주는 근육처럼 느끼게 하지만, 사실 기립근은 척추를 뒤로 조이는 근육이에요."라는 정보에 반응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바닥에 놓인 좌골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 좌골 위로 앉아 보세요." 같은 메타포를 활용한 큐가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그림 이미지를 보고 감을 잡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핸즈-온을 통한 소통이 가장 잘 먹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문제 상황을 분석하고 방법론과 언어를 찾는 작업은 각 회원의 특성에 따라 나에게 늘 다른 답과 길을 제시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실패의 역사가 회원과 나 사이에 쌓일 때 그만큼 다음번에는 보다 그 회원에게 적확한 가이드를 제시하기 위한 데이터가 구축된다고 생각한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Etienne Girarde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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