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경험담#11
저는 30대 중반 아재입니다. 제가 20대이던 대학교 재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주제로 소소한 깨달음을 적었던 글입니다. 오래전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주유기들도 사람을 닮았다는 걸 말이지요. 과연 어떤 점에서 사람을 닮아 있을까요? 그건 바로 주유기마다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삶을 꾸려나가고 있듯이요.
이 글은 9개월 동안 주유소 알바를 하며 느낀 주유기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 주유소는 주유기가 총 12개인데, 모두 15년 이상 한 자리를 지켜온 녀석들입니다. 저보다 짬을 한 참이나 더 먹은 선배(?)들이지요. 같은 곳에 있지만,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1번 주유기입니다. 숫자 1을 달고 있지만 이 주유기의 삶이 1등은 아닌 것 같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지만 주유소에서는 예외입니다. 이 1번 주유기는 보통 일반 승용차 손님들을 만날 때가 많으며, 가끔씩 외제차 손님을 받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주유 소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녀석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주유기라고나 할까요? 이건 7번 주유기도 마찬가지군요.
1번, 7번 주유기의 삶과 사람들의 대부분 삶은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와 반대로 외딴곳에 떨어져 부르주아(?) 삶을 살고 있는 녀석이 있습니다. 바로 12번 주유기입니다. 이 녀석은 고급휘발유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고급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만큼 고급스러운 녀석이지요. 주로 외제차 손님들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기한 차들이 주로 이 주유기 앞에 섭니다. 또 주유기의 줄 길이가 3m 이상 되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차의 주유 구멍에도 쉽게 닿을 수 있습니다.
평소 놀고 먹다가 어쩌다 들어오는 외제차 손님을 받기만 하면 되는 녀석입니다. 주유소의 12개 주유기 중에서 가장 여유 있게 사는 녀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른 10개의 주유기들과 떨어져 있기에 왕따처럼 보이기도 하는 녀석입니다. 한쪽에서 뼈 빠지게 기름을 끌어올리고 있는 다른 주유기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지요. 하루 동안 하는 일은 많지 않지만 존재감만큼은 다른 주유기에 뒤지지 않습니다. 불공평해 보이지만 태생이 그러한 것을 어쩌겠습니까?
이번엔 2번과 3번 주유기입니다. 둘 다 경유를 담당하고 있지요. 이 둘은 사이좋게 붙어 있습니다.
샴 썅 둥이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붙어있는데도 서로의 삶은 다릅니다. 2번 주유기는 하루 동안 쉴 새 없이 일하는데, 3번 주유기는 거의 놀고먹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2번 주유기는 집안 살림과 바깥일을 다하는 아내, 3번 주유기는 철없는 남편일 수도 있겠습니다.
3번 주유기는 줄의 굵기가 굵어서 기름을 더 빨리 뽑아 올립니다. 일을 시키면 큰 힘을 써서 잘 해낼 녀석이지요. 그런데도 주로 2번 주유기가 일을 더 많이 합니다. 사실 3번 주유기는 좀 아프거든요.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놀고먹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잘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2번 주유기는 아픈 3번 주유기를 대신해 더 일을 많이 합니다. 배려심이 깊은 녀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둘은 정말 친한 사이인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말없는 주유기들도 서로 아끼는 마음은 있는가 봅니다.
4번 주유기. 우리 주유소에서 고생을 제일 많이 하는 녀석입니다. 하루에 받는 차가 가장 많은 녀석이거든요. 주유소에 들어온 대부분의 승용차들 대부부이 이 4번 주유기 앞에 섭니다. 이 주유기를 보면 왠지 모르게 정이 갑니다. 이 주유기만 따로 떼서 글을 쓴 적도 있지요. 숫자'4'를 달고 있는 것이 숫자'4'를 똑같이 달고 사는 대학교 4학년 제 모습을 닮은 것 같았거든요.
4번 주유기가 기름을 뽑아 올리는 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알 수 있을 만큼 저와 친한 녀석입니다. 손님이 가득 주유하실 때는 이 주유기와 대화를 나눕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어떤 반찬에 밥을 먹을까?'
'인턴 원서를 내볼까?'
'다른 친구들은 벌써 취업했는데, 나는 어떤 길로 가야 하는 것일까?'
비록 들려오는 답은 없지만, 4번 주유기는 묵묵히 제 말을 들어줍니다. 그래서 4번 주유기가 제일 좋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가족 또는 불알친구 같은 녀석이지요. 가장 열심히 일하고 가장 많은 사랑도 받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녀석이기도 합니다.
아마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주유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6번 주유기는 주유소에서 경유차 손님을 가장 많이 받는 녀석입니다. 4번 휘발유 주유기와 쌍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지요. 주유기 줄의 굵기가 굵어서 기름이 들어가는 속도가 빠릅니다. 물론 주유 속도의 최고봉은 10번 경유 주유기입니다만(우리 주유소에서 주유 속도가 가장 빠르답니다), 6번 주유기가 4번 주유기 다음으로 고생이 많지요.
싼타페, 투산, 갤로퍼, 코란도와 같은 6인용 이상 차와 큰 트럭들을 맞이하는 녀석입니다. 경유차 특유의 덜덜 거리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왔기 때문에 귀가 잘 안 들릴지도 모릅니다. 바깥쪽에 있는 주유기라서 오후가 되면 지는 해를 향해 많은 생각에 잠겨 있는 녀석입니다. 아름다운 노을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주유기라고나 할까요?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시인 아니면 로맨티시스트의 낭만을 즐길 줄 알았을 것 같습니다.
이 녀석이 주유 속도가 가장 빠른 10번. 요새 일본 애니메이션 이니셜 D를 재밌게 보고 있는데요. 아키나의 최소 타쿠미를 닮은 녀석이지요(애니메이션에서 그 지역의 가장 빠른 자동차 레이서를 '최속'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가장 빠르게 기름을 넣는 우리 주유소의 최속 10번이지요.
무게도 많이 나가서, 가장 건장한 느낌을 지닌 녀석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건장한 체격을 지닌 운동선수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6번 주유기보다는 일을 많이 하진 않지만 바쁠 때는 꼭 필요한 존재랍니다.
주유소의 맏형같은 존재지요. 뒤에서 아우들을 지켜보는 든든한 녀석이라고나 할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 주유소 12개의 주유기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이거든요. 지금 이 순간, 서로 다른 삶고 있는 우리들 각자처럼 말이지요.
내일 저는 이 주유기들을 다시 만나러 갑니다. 내일도 열심히 일해서 생활비에 보태야 하거든요. 아직 12개 주유기들의 속을 다 들여다 보지 못했지만, 조금씩 알아가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