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툼과 법 : 형사 재판
철수는 자기 회사에 천만 원을 내면 매달 백만 원의 이자를 준다고 영희에게 말했습니다. 영희는 계약서를 쓰고 철수에게 천만 원을 주었습니다. 한 달 뒤에 영희는 백만 원을 받았지만 그다음 달부턴 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영희는 철수에게 백만 원을 돌려줄 테니 자기 돈 천만 원을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철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돈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영희는 900만 원을 잃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큰 피해를 입었을 때 피해자가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못하거나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으면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혼자서 끙끙 앓는다고 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진 않습니다. 돈을 떼인 영희는 자기 돈을 받아내기 위해 불법이 아닌 모든 방법을 시도해야 합니다. 철수에게 계속 연락하고, 철수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하면서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온갖 방법을 써도 결국 돈을 받지 못했다면 남은 방법은 포기하거나 경찰서에 신고하는 것뿐입니다.
작은 피해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큰 피해라면 쉽게 포기해선 안 됩니다. 그렇다고 너무 어려운 일을 혼자서 해결하려고 무리하는 것 또한 좋지 않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나 가해자를 원망만 하는 것은 좋지 않은 태도이며 무엇보다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됩니다. 영희는 경찰서와 법원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영희는 철수를 경찰서에 신고하고 형사 재판을 통해 법의 처벌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법원에 재판을 신청하고 민사 재판을 통해 피해 보상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을 모두 해도 됩니다.
영희는 철수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희가 철수의 처벌을 목표로 정했다면 형사 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영희는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변호사에게 형사 재판 준비를 맡기거나 혹은 경찰서에 가서 철수의 범죄를 신고하고 고소장을 직접 써야 합니다. 이후에 영희가 경찰서에 몇 번 다녀오면 영희의 할 일은 끝납니다. 나중에 법원은 영희에게 철수가 받은 처벌을 알려 줍니다. 그러면서 영희와 철수의 형사 사건은 끝납니다. 생각보다 형사 재판을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재판이라고 하면 흔히 재판을 구경하는 사람(방청객)이 있고, 가해자는 죄수복을 입고, 변호사가 서로 열심히 말을 주고받는 상황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희 사건처럼 간단한 형사 재판은 경찰서만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끝입니다. 변호사에게 일을 맡겼다면 경찰서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 형사 재판은 서류를 가지고 간단하게 재판을 진행하기 때문입니다(약식 재판).
그 대신 재판 결과가 나온 뒤에, 피해자나 가해자 중 한쪽이 결과에 만족하지 않아 다시 재판을 받고 싶다면 2번까지 재판을 더 신청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턴 판사를 가운데 두고 피해자 측과 가해자 측이 말을 주고받는 법원 재판을 하게 됩니다(정식 재판).
축구 경기에서는 두 팀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대결하고 점수가 높은 팀이 이깁니다. 비슷하게 재판에서는 피해자 측과 가해자 측, 두 팀이 법에 따라 대결하고 자기주장을 잘한 팀이 이깁니다. 자기주장을 잘하려면 사건에 대한 사실을 제대로 말하고 증거를 통해 이유를 잘 설명하면 됩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증거 없이 우기거나, 확실한 잘못이 드러나도 사과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불리합니다. 재판에서 더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자기 대신 싸워줄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주로 변호사의 도움을 받습니다. 철수와 영희 모두 자기를 위해 변호사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철수가 영희에게 실제로 피해를 주었지만, 형사 재판에서는 철수가 국가에게 피해를 준 것으로 봅니다. 사기나 도둑은 나라 질서를 망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희가 피해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형사 재판에선 국가가 주된 피해자가 됩니다. 국가는 자기 대신 싸워 줄 전문가, 검사를 직접 선수로 세웁니다. 그래서 형사 재판에서 영희는 따로 자기 변호사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영희가 바쁘거나 경찰서에 직접 가기 싫다면 자기 변호사를 구해 일처리를 맡길 수는 있습니다.
영희 팀은 국가가 검사를 선수로 무조건 정해주지만 철수 팀은 그렇지 않습니다. 철수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건이 간단한 서류 재판(약식 재판)으로 끝나면 철수는 굳이 변호사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재판 결과가 철수 마음에 들지 않아 정식 재판을 신청하거나 약식 재판이라도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자기 변호사가 필요합니다. 정식 재판을 할 때 철수에게 변호사가 없다면 철수는 법 전문가인 검사와 직접 대결해야 합니다. 철수는 어려운 법률 용어와 검사의 숙련된 재판 진행에 휘말려 하소연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재판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철수는 변호사를 직접 구할 수 있고 구하지 못했다면 법원은 국가 소속 변호사, 국선 변호사를 무료로 구해 줍니다. 그렇게 되면 영희 팀의 검사와 철수 팀의 개인 변호사 혹은 국선 변호사가 대결하게 됩니다. 검사가 이기면 철수가 많은 처벌을 받고, 철수 팀 변호사가 이기면 무죄가 되거나 처벌이 많이 줄어듭니다.
영희와 철수의 개인 사건이지만 검사·국선 변호사 등 국가가 많은 부분을 도와주는 재판이 형사 재판입니다. 그에 반해 민사 재판은 검사나 국선 변호사가 없어 양쪽 모두 개인 변호사를 직접 구해야 합니다. 그만큼 형사 재판은 민사 재판에 비해 부담이 적습니다. 형사 재판은 적은 부담으로 가해자에게 무거운 처벌을 줄 수 있기에 형사 재판을 신청하는 고소라는 말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큰 압박을 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형사 재판이 무조건 피해자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형사 재판은 한번 재판 결정이 나면 재판을 두 번 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고소 단계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일사부재리). 영희가 철수를 사기죄로 고소하고 재판 결과를 받았는데 그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공개 재판(2심)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찰서에 가서 그 사건으로 다시 고소하는 것은 안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재판 결과가 무죄가 나왔다면 영희는 철수를 모함한 셈이 되므로 철수가 오히려 영희를 거짓 고소한 죄, 무고죄로 거꾸로 고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심각한 사건이 아니라면 급하게 하는 고소는 좋은 결정이 아닙니다. 꼭 고소하겠다고 결심했다면 증거를 충분히 모아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철수가 처음부터 영희에게 사기를 치려고 한 것을 검사가 알아냈다면 철수는 사기죄로 처벌받습니다. 그러나 계약서에 조그맣게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라는 글이 있거나 철수 회사가 실제로 사업이 잘되어서 그런 계약을 한 것이라면 사기죄로 처벌받지 않습니다.
영희가 철수를 고소하고 6개월 뒤에, 영희는 철수가 벌금 500만 원을 국가에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법원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영희는 철수가 벌을 받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기 돈 900만 원을 받아 낸 것은 아니었기에 여전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영희는 900만 원을 버린 셈 치고 잊어버릴지, 민사 재판을 통해 사기당한 돈을 받아낼지 결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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