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툼과 법 : 민사 재판
영희는 자기 돈 900만 원을 포기하지 않고 철수에게 받아내기로 했습니다. 이제 영희는 민사 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영희가 민사 재판을 이기면 법원에서 철수에게 돈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만약 철수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국가는 철수 재산을 강제로 팔아서 영희에게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형사 재판은 국가가 세금으로 재판을 해 주지만 민사 재판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희는 자기 돈으로 민사 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돈을 받아내기 위해 돈을 더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법은 사회 질서 유지와 사람의 생명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현실에서 이와 관계있는 문제가 생기면 국가가 직접 돈을 들여 형사 재판을 해 주면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처리합니다. 그 대신 법은 개인의 다툼 문제를 사회 질서 유지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에 그런 문제가 생기면 국가가 직접 돈을 들여 재판을 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 돈을 들여 민사 재판을 직접 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교통사고, 학교 폭력, 돈 문제 등등 수많은 범죄와 다툼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일부러 상대방에게 피해 주는 일, 법을 어긴 일은 범죄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상대방에게 피해 준 일, 개인의 약속을 어긴 일은 범죄가 아닙니다. 그 대신 다툼이 생깁니다. 다툼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그나마 낫고 서로가 편합니다. 상대방 물건을 자기가 실수로 망가뜨렸다면 풀로 붙여서 돌려주는 것보다 돈으로 보상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습니다. 교통사고 다툼이나 이혼 다툼에선 상대방에게 받은 정신적인 피해를 돈으로 계산해서 보상받기도 합니다(위자료).
개인 다툼을 다루는 민사 재판은 ‘OO 이유로 <얼마의 돈>을 상대로부터 받게 해 주세요’라는 돈에 대한 재판이 대부분입니다. 여기서 재판을 신청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받아 내려는 그 <얼마의 돈>을 ‘소송 가격’이라고 합니다(소송가, 소가).
영희가 재판을 통해 철수로부터 900만 원을 받아 내려고 한다면, <소송가 900만 원인 민사 재판>을 하게 됩니다. 민사 재판은 얼마짜리 재판인가가 중요합니다.
영희가 민사 재판을 하려면 경찰서가 아닌 법원으로 가야 합니다. 대부분 자기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지방법원에서 민사 재판을 신청합니다. 그런데 위험한 병에 걸리면 자기가 자신을 치료하기보다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중요한 민사 재판을 하려면 법원에 직접 가서 혼자 준비하기보다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환자가 병과 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모두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의사가 시킨 대로 따르면 됩니다. 비슷하게 민사 재판 또한 자기 변호사가 시킨 대로 하다가 나중에 재판 결과를 받으면 됩니다. 재판에 직접 참석하는 과정이 있긴 하지만 복잡한 내용은 서류로 진행하고 간단한 대답 정도만 하게 됩니다. 이것마저 변호사가 대신 참석하고 대답해도 됩니다.
형사 재판은 ‘검사 대 가해자 변호사’의 대결이라면, 민사 재판은 주로 ‘피해자 변호사 대 가해자 변호사’의 대결입니다. 민사 재판은 변호사 도움을 받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서 변호사 없이 혼자 재판 준비를 해도 됩니다. 그 대신 재판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대충 준비하면 재판을 거절당하거나 재판에서 지게 됩니다.
민사 재판은 검사나 국선 변호사 같은 국가의 도움이 없습니다.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변호사를 개인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문제는 변호사 비용이 변호사마다 다르고 대부분 상당히 많은 돈이 든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돈을 받아 내려고 돈을 상당히 써야 하는 일이 바로 민사 재판입니다. 그래도 병원비 아까워서 병원에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민사 재판을 신청하려면 일단 재판 신청비를 내야 합니다. 영희의 <소송가 900만 원 민사 재판>의 신청비는 약 15만 원 정도입니다. 900만 원을 철수에게 받아낼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낼 만한 돈입니다.
그러나 변호사 비용은 영희가 선택하는 변호사에 따라 100만 원이 될 수도 300만 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900만 원 받아내려고 300만 원을 쓰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됩니다. 철수 역시 변호사를 구하려면 상당한 돈을 내야 합니다.
철수 때문에 영희가 재판 신청비와 변호사 비용을 들여 민사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영희가 재판에서 완전히 이기면 철수가 재판을 하게 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철수는 900만 원을 영희에게 돌려주고 영희의 변호사 비용 일부분까지 대신 내야 합니다. 만약 철수가 재판을 이긴다면 하지 않아도 될 재판을 철수가 한 것이기에 철수의 변호사 비용 일부분을 영희가 내야 합니다. 900만 원을 잃은 영희의 손해는 더 커집니다. 재판에서 진 쪽이 상대방에게 주어야 하는 변호사 비용 일부분은 법원에서 정해 줍니다. 주로 소송가가 높을수록 비쌉니다.
병원비는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있어 싼값에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호사비는 특별한 보험 제도가 없어 비싼 값에 변호사 서비스를 이용해야 합니다. 변호사 비용에는 ‘착수금’과 ‘성공보수’가 있습니다. ‘착수금’은 변호사에게 일을 맡기고 내는 돈입니다. 변호사는 그 돈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성공보수’는 재판에서 이겼을 때 변호사에게 주는 일종의 보너스입니다. 재판에서 지면 약속한 성공보수를 주지 않습니다.
영희는 착수금 200만 원과 성공보수 100만 원을 주기로 변호사와 계약했습니다. 변호사비 300만 원은 부담되는 돈이지만 민사 재판에서 이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희의 <900만 원 민사 소송>에서 재판에 이겼을 때 상대방에게 받을 수 있는 변호사 비용 일부분은 대략 90만 원입니다.
영희가 재판을 완전히 이겼다면 철수로부터 90만 원의 변호사비를 받아낼 수 있습니다. 영희는 철수에게 받은 90만 원과 자기 돈 210만 원을 합쳐서 자기 변호사에게 약속했던 300만 원을 주게 됩니다. 결국 영희는 민사 재판을 하느라 210만 원을 손해 봤습니다. 하지만 철수에게 900만 원을 받아낼 수만 있다면 대략 700만 원을 건지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영희가 재판에 완전히 지면 영희는 자기 변호사에게 성공보수를 제외한 200만 원을 주고, 철수에게 변호사비 90만 원을 주어야 합니다. 재판 비용으로 대략 300만 원 손해가 생겼으므로 영희의 손해는 900만 원에서 1,200만 원으로 더 커졌습니다. 가뜩이나 억울한 영희는 더 억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민사 재판은 대부분 억울한 쪽이 이깁니다. 그러나 재판에 꼭 필요한 주장이나 증거를 제대로 제출하지 못하면 억울한 쪽이라도 언제든지 질 수 있는 것이 민사 재판입니다.
영희가 재판을 이긴다고 해서 문제가 무조건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철수는 재판 결과에 따르지 않고 추가 재판(2심)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희의 승리가 취소되고 다음 재판에서 다시 대결해야 합니다. 만약 철수가 다음 재판(2심)에서 또 졌어도 세 번째 재판(3심)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두 번째 재판이 끝이라고 보면 됩니다. 세 번째 재판은 영희나 철수의 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법이나 판사가 잘못되었는지 확인하는 재판입니다. 재판이 늘어날수록 변호사 계약을 각각 따로 해야 하기에 양쪽의 재판 비용이 계속 늘어납니다.
영희가 첫 번째 재판을 이기고 철수가 그 결과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법원에서 철수에게 영희의 돈을 갚으라고 명령했더라도 철수가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법원은 ‘강제 집행’을 합니다. 법원이 철수의 물건, 재산이나 집을 강제로 팔고(경매) 그 돈을 영희에게 주는 것입니다. 흔히 영화나 소설에서 갑자기 자기 집에 여러 사람이 와서 ‘빨간딱지’를 붙인 장면이 나옵니다. 빨간딱지는 조만간 법원에서 딱지 붙은 물건을 강제로 가져가서 판다는 뜻입니다. 철수가 정말로 돈이나 재산이 없어 영희에게 돈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강제로 빼앗을 물건마저 없기에 법원도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습니다. 법원은 고작 철수가 은행 이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일 정도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철수가 파산을 허락받으면 민사 재판에서 영희가 이긴 결과마저 취소됩니다. 철수가 빈털터리가 되거나 파산하면 돈과 시간을 들여 얻은 민사 재판 승리마저 소용없게 됩니다.
결국 민사 재판을 하게 되면 재판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고 재판에 이기더라도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사회의 법과 제도로 사람 다툼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만한 일을 최대한 미리 피하면서 재판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살면서 피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피하기 쉬운 문제는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희가 철수에게 맡긴 돈 900만 원이 영희가 잃어버려도 별 문제없는 돈이라면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돈이 영희 전 재산이라면, 철수가 영희에게 사기 친 것은 나쁜 일이지만 영희 행동 또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전 재산을 남에게 맡기거나, 노력 없이 큰돈을 벌려고 하거나, 급하게 큰돈을 주고받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재산 일부를 맡기고 이득을 얻는 것은 쓸만한 일이지만, 전 재산을 맡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 전 재산을 맡기고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돈을 다시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상식입니다. 세상에서 이득을 무조건 매달 10% 주는 금융상품, 재테크 상품은 아직 없습니다. 돈에 관한 기본 상식이 있어야 터무니없는 상품에 속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판기 이용처럼 적은 돈을 넣고 물건이 바로 나오는 일은 있어도 큰돈을 급하게 주고 무언가를 빨리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사실 역시 생활 기본입니다. 생활 기본이 부족한 것이 범죄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기본이 부족하면 쉽게 피할 수 있는 문제에 휘말려 마음고생을 하고 큰돈을 손해 보게 됩니다. 하기 싫어도 억지로 민사 재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됩니다.
이것은 돈거래에만 관계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학교・직장 생활에서 민사 재판으로 다툴 만한 문제는 수두룩합니다. 자기가 어디에 있던 무모한 일, 지나치게 욕심부리는 일, 급하게 일 처리하는 습관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법원의 도움을 받기보다 심각한 문제로 커지기 전에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낫습니다.
소송가 2,000만 원 이하의 비교적 적은 금액을 다루는 민사 재판은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재판을 많이 도와줍니다. 그곳에서 상담하면 재판을 준비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도움을 받더라도 민사 재판에 필요한 증거 자료를 모으거나 상대방의 정보(이름, 전화번호, 주소)를 확인하는 정도는 자기가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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