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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에그 Feb 15. 2024

4개월 제주살이



3년간 근무한 회사를 퇴사하고 수술날짜를 기다리며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이 된다. 그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나의 정신적 멘토이신 '청울림'이다. 그 분과의 인연은 2015년 블로그를 통해서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많은 자극을 받았다. 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의 삶을 살라며 블로그를 시작하라고 했다. 바로 그거다. 오늘의 청울림을 만든 것도 결국 블로그다. 나도 이제는 블로그를 시작해보고 싶다.

블로글 강의를 찾아본다. 나는 돈을 들이더라도 뭐든 제대로 배우는 편이다. 그게 결국 시간과 돈을 절약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블로그 강의를 하는 사람은 넘쳐났다. 누구한테 강의를 들어야할까? 결국 블로그 글을 꾸준히 진정성있게 쓰는 사람한테 마음이 갔다. 차근차근 블로그 쓰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나도 블로그에 첫 글을 쓴다.

블로거가 되려면 먼저 어떤 글을 쓸지 정해야 한다. 처음엔 누구나 뭐부터 써야할지 막막하다.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책을 읽고 후기를 쓰기로 맘을 먹는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행복하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흘러갔다. 드디어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하고 나니 나와 같은 암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블로그에 <갑상선암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역시 정보성 글이라 그런지 조회수가 많이 나온다.

2020년은 코로나로 온국민이 힘들어 하던 해였다. 환자인 나에게는 더욱 그랬다. 외출도 힘들고 집에만 있는 생활이 답답했다. 7월말 외동 아들이 군대에 입대를 했다. 코로나로 인해 훈련소에 드라이브스루로 아들을 내려주고 그냥 와야했다. 눈물을 흘릴 경황도 없이 말이다. 외동아들도 없으니 나의 생활은 더욱 무료해졌다. 코로나로 인해 때마침 남편은 재택근무가 가능해졌다. 우리는 일생에 있어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나의 요양을 겸한 4개월 제주살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건설회사다. 그 당시 제주도에 빌라 4개동 44채를 지어 분양을 하고 있었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과정에 예기치 않은 중국사드문제가 발생했다. 분양사업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자금난에 시달리자 회계를 담당하던 나는 알게 모르게 업무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미분양으로 오랫동안 보유하고 있던 빌라는 코로나로 인해 년세로 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회사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나의 제주살이를 그곳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제주한달살기를 많은 사람들이 꿈꾼다. 누군가의 꿈이 우리에겐 현실이 되었다. 그것도 한달이 아닌 4개월이다. 9월 제주의 날씨는 너무 좋다. 매일 매일 맛집과 카페투어를 다닌다. 먹고 싶은 것도 원없이 먹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부부는 의미있는 제주살이를 위해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한다. 제주에 작은 책방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제주책방투어>를 하고 싶었다. 걷는 걸 싫어하는 남편은 전기자전거를 구입해서 <올레길투어>를 하고 싶단다.

나의 블로그는 이제 제주살이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매일 매일 사진을 찍다보니 사진 찍는 기술도 늘어간다. 제주살이로 글을 쓰다보니 게스트하우스에서 체험단 제의가 들어왔다. 우리가 머무는 곳은 제주시 애월이다. 서귀포시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1박 2일 여행을 떠난다. 겸사겸사 서귀포시 여행을 계획해 본다. 숙소근처 올레길도 가보고 관광지도 들러온다. 꿈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내 인생에 이런 시간들이 언제 또 올까 하면서 말이다.

둘만의 시간이 무료해질때쯤 친구들이 놀러왔다. 남편은 기사로 나는 가이드로 멋진 여행을 계획한다. 나의 35년지기 친구들은 우리 부부 덕분에 1박 2일이지만 어디서도 느껴볼 수 없는 알찬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내가 생각해도 뿌듯하다. 코로나가 없어지면 50대 여성 대상 국내여행만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를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꿈도 꿔봤다. 무슨꿈인들 못꾸겠나...

11월이 되자 좀 줄어드나 했던 코로나 확진자가 제주에서조차 늘어갔다. 청정한 제주를 위해 출입을 제한한다는 얘기가 돌았다. 놀러오려던 지인들이 여행을 취소했다. 우리도 외출을 자제했다. 남편은 재택근무중이라 업무에 집중해야 했다. 결국 제주에서 나는 외로움에 시달렸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15년전 두 번의 차사고 이후 운전을 못해서 더 그랬다.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쉽지 않은 제주에서 운전을 못한다는 건 최악이었다.

돌이켜보니 제주살이는 한달은 아쉽고 두달까지가 딱이다. 4개월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다. 특히나 아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부만 함께 하는 4개월은 행복하기만 한건 아니었다. 나의 제주살이는 일종의 '노후생활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후 제주도에서 부부가 함께 하는 생활을 꿈꾼다. 행복한 노후를 상상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노부부가 바닷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다정한 모습을 상상했다면 경험자로서 말하는 데 "꿈깨!" 라고 말하고 싶다.

결혼해서 20년 넘게 남편과 살아왔다. 하지만 하루24시간을 4개월 동안 살아본 건 나도 이번이 처음이다. 하루에 잠깐 보는거랑 하루종일 같이 있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 남자는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 있는건가 싶었다. 아무리 좋은 사이도 이런 상황이면 나빠질 확률이 높다. 즐겁던 제주살이도 세 달째가 되니 꿈이 아닌 현실이다. 삼시세끼를 다 사먹을 순 없다. 점심 한끼는 사먹는다 해도 아침, 저녁은 직접 요리를 해야 한다. 오늘은 뭐 해 먹나 하는 고민을 여기서도 한다. 특히나 관광지가 아니라 저녁이면 갈만한 식당도 별로 없다. 이 곳은 배달도 쉽지 않다.

제주도에서 현지인처럼 살다보니 알게 된게 있다. 관광지 식당이 아닌 동네 숨은 맛집들은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지 않는다. 보통 점심장사를 하고 문을 닫는다. 재료가 소진되면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닫는게 다반사다. 이유를 생각해봤다. 대부분 현지인보다는 외지인일 확률이 높다. 도시의 생활이 싫어 정리하고 제주에 내려왔다. 생활을 위해서 놀 수는 없다. 그러니 식당을 차리고 메뉴 한 두개에 승부를 건다. 점심장사만 바짝하고 남는 시간은 여유롭게 제주생활을 즐긴다. 이런 생각이 아닐까... 여기에 와서 조차 아침부터 늦은시간까지 장사를 한다면 돈은 벌지 모르겠지만 도시생활과 다를게 없다. 현지인처럼 살아보니 그들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거 같았다.

남편은 집에 있을 때도 저녁에 가볍게 나와 맥주 한잔 하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술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아줌마들과 만나 수다떨며 먹는 한잔의 맥주는 나도 좋아한다. 여기서 핵심은 '술'이 아니라 '수다'다. 아줌마라면 다들 이해할거다. 매일 밤 남편과 마시는 맥주 한잔이 즐거우면 얼마나 즐거울까? 이때 알았다. 은퇴를 하더라도 각자의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취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만날 친구가 가까이 있어야 함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12월이 되자 제주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외출이 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제주는 제주다. 경량패딩으로도 충분했다. 추위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제주도에서 사는 것도 괜찮다 싶다. 모두가 꿈꾸는 제주도에서의 생활에서 시간이 왜 이리 안 가는 걸까...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매일 보는 바다도 이젠 지겹다. 하도 보니 감흥이 없다.

경제적으로 자유를 이룬 사람들이 왜 일을 하는지 알거 같다. 재벌가 자식들이 왜 마약을 하고 자살을 하는지 알거 같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맨날 먹고 노는 여행같은 삶이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란 걸 나는 4개월 제주살이를 하며 알게 되었다. 힘든 일상속에서 어렵게 시간을 내서 2박 3일로 왔던 제주가 내겐 더 즐거운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면 여기서의 4개월이 추억이 되고 좋았던 시간이었구나 할거란 것도 알고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저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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