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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에그 Feb 19. 2024

어릴적 우리집, 지금은 친정집



4개월의 제주살이를 시작하려니 걸리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혼자 사시는 친정엄마다. 안산에서 홀로 지내던 엄마는 4년전 내가 사는 곳 근처 아파트로 이사를 하셨다. 엄마 소원은 딸들과 가까이 살며 반찬도 해주고 같이 밥도 먹는거라 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막내딸이 엄마 소원을 풀어 드렸다.

늦은 나이에 장남에게 시집을 와서 아들을 낳으려고 5년간 4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셨다. 나는 1남 3녀중 셋째딸이다. 동생이 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형제는 몇 명이 되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착하기만 한 남편 덕분에 엄마의 삶은 아빠처럼 착하게 살 수 없었다. 

아빠는 그 당시 개인용달을 하고 계셨다. 1톤 트럭을 가지고 이런 저런 짐을 실어 나르는 일이다. 주차장에 있다 순번대로 일을 나가다보니 월급도 일정치 않았다. 하루는 우리보다 잘 사는 동생네 갔는데 쇼파가 낡았다며 돈을 주고 왔다고 한다. 넓은 2층 단독주택에 살며 집에 쇼파가 있다는 건 그래도 좀 살만하다는 거다. 우리 아빠가 이런 사람이다. 막말로 법 없이도 살수 있는 그런 사람이셨다.

나는 서울 상도동에서 태어났다. 결혼전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상도동하면 떠오르는 분이 한명 있을 거다. 언니따라 학교앞 놀이터에 가면 건장한 아저씨들이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많이 봤다. 그때는 누군지 몰랐다. 어른이 되서야 누군가를 경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니들은 그분(?)이 사는 동네에 있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나중에 들으니 친구들이 으리으리한 집에 살았다고 한다. 집에 놀러가면 가정부 아줌마도 있었다고...

엄마는 배움은 없지만 지혜로운 분이셨다. 아이 넷을 데리고 남의 집 살이를 하려니 힘이 드셨단다. 아빠를 믿었다간 아무것도 못할거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6살이 되던 해 친척들에게 일부 돈을 꿔서 방이 4개인 1층짜리 주택을 매수하셨다. 상도동에서의 생활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우리집이었던 노량진에서 살았던 기억은 선명하다.

그때 우리집은 흑석동과 상도동을 경계로 하는 상도터널옆 노량진 본동이다. 진짜 교통이 최고인 동네다. 서울 어디를 가도 집을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을 정도다.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언덕배기에 있는 집이었지만 그 덕분에 85년도에 준공된 여의도 63빌딩이 앞마당에서 보이는 그런 집이다. 

게다가 여의도에서 불꽃놀이를 하면 집에서 편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19살이 될때까지 살았다. 엄마 덕분에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이사 안 다니고 편하게 살았다. 그걸 결혼하고 8년 동안 7번 이사를 하며 뼈저리게 느꼈다. 좋고 안 좋고를 떠나 내집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나는 여상 졸업반일때 바로 취직을 했다. 그런데 동네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하나둘 집을 팔고 떠난다. 대문과 벽에 빨간색 X자가 그려지는 집들이 늘어 갔다. 빈집들 때문에 집에 가는 길이 무섭기까지 하다.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부모님은 집을 팔았다. 우리 동네가 재개발이 되는 거였다. 집을 팔지말고 아파트를 분양받았어야 한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부모님도 나도 부동산에 '부'자도 몰랐다. 지금은 그곳에 신동아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집을 팔아서 우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당시 엄마는 병원에 가도 이유를 모르는 병으로 힘들어 하셨다. 때마침 친척중에 개척교회를 하는 분이 있었다. 교회는 강서구 화곡동에 있었는데 교회를 다니면서 엄마 병세가 나아지셨다. 그걸 계기로 우리는 알지도 못했던 화곡동에 신축 빌라를 사서 이사를 했다. 

나는 엄마의 이유를 모르는 병이 갱년기 우울증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도 신축빌라가 아닌 아파트를 사서 갔어야 했다. 그러나 가족 모두 부동산에 '부'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헌집에서 살다 새집에 왔다는 것만으로 좋았던 시절이다.

태어나서 서울을 떠나본 적 없던 나는 1999년 결혼을 하면서 경기도민이 되었다. 그때부터 내가 살던 집은 친정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빌라는 집장사들이 날림으로 짓는다는 소리가 있는데 역시나였다. 10년이 넘어가자 윗풍도 세고 여기저기 고장이 나고 집값도 생각보다 많이 오르지 않았다. 어느날 4개동으로 이루어진 친정집 빌라를 누군가 한집씩 사기 시작했다. 

산다는 사람이 있자 부모님은 집을 팔고 신월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것도 신축 나홀로 아파트 전세로 말이다. 신축아파트는 역시나 좋았다. 그러나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남동생이 직장을 안산으로 옮기면서 친정은 또 다시 이사를 했다.

그사이 홀로된 엄마와 남동생은 그 이후로도 2년마다 이사를 다녔다. 엄마는 나이 70이 넘어 내집 없는 서러움을 당하고 사셨던거다. 오래살고 싶어도 내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사를 하셔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동생이 다니던 회사가 부산으로 이전을 한다고 했다. 

엄마는 나름 제2의 고향이 된 안산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혼자 살게 되셨다. 엄마는 당뇨가 있으신데 가끔 식사를 제대로 안하고 약을 드시다 저혈당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몇번 있었다. 결국 4년전 우리집 근처로 아파트를 매수해서 이사를 하셨다. 이제 친정이 코앞이 된거다.

기존 전세금으로 아파트를 구입할 수 없었다. 처음엔 금액에 맞는 빌라를 알아봤는데 영 마음에 안든다. 그리고 빌라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고민이 되었다. 그때 나는 재테크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부린이를 벗어난 상태였다. 

엄마집은 내손으로 구해드리고 싶었다. 결국 부족한 자금은 대출을 받아 동생명의로 집을 매수했다. 오래된 복도식아파트였지만 재건축이슈도 있고 중요한 건 재래시장이 엎어지면 코닿는 거리에 있다는 거였다.

인테리어도 한지 얼마 안된 집이라 엄마는 마음에 들어 하셨다. 이제 죽을때까지 이사를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엄마가 편해 보여서 좋았다. 내가 살던 집에서 10분거리에 친정이 있다. 직장을 다니던 나는 엄마가 해주시는 반찬과 김치를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주말에는 엄마와 함께 맛집투어를 다녔다. 엄마가 늘 말씀하시던 딸네랑 가까이 살며 반찬도 해주고 밥도 먹고 싶다는 꿈이 이루어진거다. 부동산공부를 하고 좋은 시기에 엄마집을 살 수 있게 해드린거 같아 나또한 기분이 좋았다.

내집이란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집의 가치를 떠나 마음의 안정을 주는 곳이 바로 내집이다. 어릴적 이사걱정 없이 살 수 있었던 건 지혜로운 엄마덕분이었다. 결혼후 20년이 넘도록 아직 내 집에서 살지 못하는 나를 보니 그렇다. 나도 이제는 세를 준 내집으로 조만간 들어가서 살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내 명의의 집에서 직접 살아 보는 기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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