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등장한 기사식당, KISA의 세계관, 브랜딩 전략을 분석합니다.
올해 4월 20일에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오픈한 KISA는 기사식당입니다. 브랜드의 컨셉도 세계관도 우리가 아는 그때 그 시절 기사식당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의 뉴욕 맨해튼에 나타난 것이죠. 과거의 한국과 지금의 뉴욕을 잇는 이 식당은 당연히 중간세계를 이야기하는 제로버스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오픈 소식과 함께 인터넷이 들썩들썩하더군요. 이곳저곳에서 KISA를 극찬하는 리뷰가 쏟아졌고, 오픈 때 가도 2시간 웨이팅은 기본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큰 기대감을 가지고 저번 주에 드디어 방문했고, 역시나 정말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고 왔네요.
근 5~10년간 맨해튼에 오픈하는 한국 식당들은 브랜딩으로 프리미엄 이미지를 가져가거나 개성 있는 테마로 차별화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KISA도 그중 하나고요.
사실 고급스럽게 잘 포장한다든가, 레트로한 고깃집 느낌을 살린다든가 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뉴욕에서도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브랜딩 관점에서 기사식당이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브랜드가 세계관을 정말 섬세하게 구현했다는 점, 그리고 뉴욕이라는 지구 반대편 새로운 환경에 훌륭하게 안착한 점입니다. 8가지 관점에서 짚어보겠습니다.
유동 인구가 많아 차와 인파로 언제나 번잡한, 뉴욕의 세련되기보다는 꼬질한 구역입니다. 택시 기사님들이 바쁜 영업 도중에 급히 들러 끼니를 때우고 떠나는 구식 식당 컨셉과 묘하게 잘 어울리는 곳이지요.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자리 잡아 방문하기도 쉽고 평소 광고효과도 높습니다.
이번 레터를 쓰기 위해 조사하다 알았는데, 이 구역이 과거에 한인 이민 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 하네요. 여러모로 의미 있는 위치 선정입니다.
도착과 동시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꽤나 눈에 띄는 한국어 간판입니다. 오래된 뉴욕식 붉은 벽돌 건물과도 묘하게 잘 어울리죠. 간판에 영어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참 멋있었습니다. ‘이제 이래도 되는구나’싶어 감개무량 하기도 했구요.
한 면에 “동남 사거리 원조 기사 식당”이라고 한글로 써놓았는데, 말 그대로 사거리의 동남쪽에 위치한 식당이라는 뜻입니다. 뉴욕에서는 이런 사거리 방향을 지하철 입출구에 적어놓기도 하는 등 흔하게 사용합니다.
그 외에도 “원조의 품격!!”이라고 한문과 한글을 섞어 쓰거나, “앨런 대로 역전 앞”이라고 뉴욕 Allen Street 지하철역 앞에 자리함을 어필하는 위트 있는 디테일이 인상적입니다. 다른 면에는 “백반 전문 소문난 기사식당”이라고 옛날 그 느낌 그대로 적혀있어요.
간판만 보아도, “아, 뭐 하나도 대충 지나치지 않고 디테일을 살려 브랜딩했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미국 매체 리뷰들을 보면 수수하고 소박한 식당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물론 그런 컨셉으로 구현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제 관점은 조금 달랐습니다.
식당 내부는 서울 을지로 스타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옛날 식당은 아니지만, 과거의 레트로한 한국 식당을 힙하게 재현한 것이죠.
어느 한 부분도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게 놀라운 감각과 정성으로 공간이 꾸며져 있었습니다. 바깥 간판과 유리창의 메뉴 사인부터, 낡고 허름한 세월의 흔적이 거짓 없이 담긴 포토 프레임들, 의자에 리본으로 묶여 있는 그때 그 시절 알록달록한 무늬의 천 쿠션, 레트로한 좁은 화장실에서 유난히 귀에 꽂히는 옛날 한국 음악까지.
을지로에서도 모든 요소를 디테일하게 재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한국도 아닌 뉴욕에서 과거의 한국을 완성도 있게 재현하는 것은 훨씬 난이도가 있었으리라 감히 그 인고의 과정을 상상해 봅니다. 보기에 소박하다고 해서 들어간 시간과 돈과 정성도 소박하지는 않았겠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위에 말한 이유로, 서울의 레트로 트렌드를 가지고 뉴욕에서 세밀한 세계관 구현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프리미엄의 가치가 있다는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만, 아이러니하면서 짜릿하게도, 세계관에 충실하기 때문에 프리미엄 한식당 브랜드가 아닙니다. 기사식당답게 프리미엄 요소가 전혀 없어요.
파인 다이닝도 아니고, 고급스러운 메뉴를 제안하는 식당도 아닙니다. 값비싼 주류를 판매하는 것도 아니고, 메뉴에 트러플이나 캐비어, 와규 따위를 추가하는 옵션이 있지도 않았어요. 추가 옵션은 쌈을 싸 먹을 수 있는 3달러짜리 상추와 된장이 전부였습니다.
한 가지 기사식당답지 않았던 건 술을 잔에 따른 후 프로답고 정중하게 라벨을 앞으로 돌려 병을 보여주는 제스처 정도였습니다. 현지화된 매너라고 할 수 있지 싶습니다.
음식 가격도 한국 기사식당보다야 비싸지만,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 역세권인 걸 감안할 때 착한 가격입니다. 반찬 리필도 물론 다 되고 말이죠.
평범한 한국의 금속 식기에 담긴 전형적인 백반 정식입니다. 큰 쟁반에 메인 디시 하나와 7가지 반찬이 배치되어 서빙됩니다. 비위생적이거나 허름해 보이기 십상인데 전혀 그런 부분이 없었습니다. 점심 메뉴인 감자탕과 경양식 돈가스도 기사식당 테마에 맞게 매우 적절하게 브랜딩되었습니다.
반찬의 종류는 주기적으로 바뀌는 듯했는데, 워낙 맛있고 먹는 재미도 있어서 바뀌는 반찬 때문에 재방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집에서 가까웠다면 주기적으로 자주 들르고 싶었을 것 같아요.
주류는 1~2개의 정말 대중적 옵션을 제외하고는, 술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알 수 없는 한국의 로컬 과실주, 탁주, 소주, 맥주 등이 있었습니다. 독특하고 힙한 레트로 인테리어와 결이 같았습니다. 개성 있고 고급스러운 패키징인데, 음식처럼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가격대를 지키고 있더군요.
이 또한 중도를 지키며, 사려 깊고 조화롭습니다. 고급진 맛도 아니고 저렴한 맛도 아닙니다. 간이 잘 맞고 다양한 메인과 반찬의 식감과 맛이 자연스럽게 섞여 맛있습니다. 먹으면서 오감이 지겹거나 불편하지 않아요.
불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다시 돌아올 식당은 아니지만, 시공을 초월한 특별한 공간에서 불고기 백반 정식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다시 돌아오게 될 식당입니다.
서울 을지로에서 언제 뵌 것 같은 힙한 분이 입구에서 고객 수 등을 관리하고 계셨고, 뒤에서 서빙하는 곳에는 엔터 업계에 몸담고 계신 한인 2세처럼 느껴지는 쿨한 분이 계셨는데요, 의도하셨다면 너무 소름이니 아마 우연이겠지만, 그 조합 또한 브랜드에 적합하여 참 좋았습니다.
인기 식당인 만큼 오픈 시간에 맞추어 갔지만, 웨이팅이 한 시간쯤 있었습니다. 예약은 거의 받지 않고 방문 순서대로 자리를 주더군요. 택시 기사님들이 예약을 하고 들를 식당이 아닌 것을 생각할 때, 브랜드의 세계관에 충실한 방침입니다. 브랜딩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부분들이 다 맞물리는 걸 보니 정말 흡족했습니다.
주문도 빨랐고, 메뉴가 제한적이어서인지 음식도 빨리 나왔습니다. 다 먹고 정신 놓고 떠들고 있을 때, 나가라는 눈치는 주지 않지만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적당한 시점에 센스 있게 말을 걸어 저희를 현실로 돌려놓곤 했습니다. 테이블 회전율이 빠르게끔 노련하게 조정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네요. 허름한 컨셉이지만 서비스는 전혀 허름하지 않았습니다.
나가는 길에 있는 무료 커피 머신은 한국을 뉴욕에 데려다 놓는 신의 한 수였습니다. 음료를 뽑아 마실 수 있도록 미화 쿼터(25센트 동전)를 제공하는데요, 이 동전 사이즈가 백원짜리 동전과 비슷합니다. 학생 시절 빨래방에서 쿼터보다 싼 백원을 종종 대신 넣었던 추억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더라는. 특별한 경험이라 뉴요커들 마음에 식당이 보다 더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조사를 위해 식당을 구글에 검색하자마자 추천 리뷰와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데, 뉴욕 타임스, 더 뉴요커, Eater, Hypebeast, 미슐랭 가이드 등이 최상단에 뜨더군요. 누구나 알만한 공신력 있는 매체에 다 들어간 셈이죠.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서도 KISA 관련 콘텐츠가 바이럴도 많이 되고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혁신적이고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내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는 매력적인 트렌드를, 희소가치 있는 도시에 데려와 제대로 브랜딩하여 구현하고 현지화한 점이 혁신적이고 새로워 대단한 브랜드입니다.
너무나도 기사식당인데, 한국인이 타겟이 아닙니다. 둘도 없이 독특한 테마와 메뉴가 다양한 뉴요커들에게 어필하고 있어요.
기사식당 컨셉의 브랜드를 을지로 느낌으로 맨해튼에 완벽히 구현하기 위해 세심하게 손보고 고민한 흔적들이 역력했고, 시각 요소, 메뉴 구성, 서비스, 고객 경험 등이 전부 일관성 있게 KISA만의 느낌으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브랜딩 측면에서는 훌륭히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네요.
이유 없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실패할 수 있고요. 그러나 성공한 브랜드엔 언제나 이유가 있습니다.
기사식당의 브랜딩을 경험하고 나니 이곳의 성공 이유가 200% 납득되었습니다. 완성도 높은 브랜딩이 기여하는 비중이 큰 것은 당연하고, 이렇게까지 야무지게 브랜딩을 해내는 곳이 다른 부분을 대충 했을 리가 없는 것이죠.
브랜드만의 견고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야무지게 끝까지 붙들고 매달리는 길, 흐트러짐 없이 일관적이고 조화로운 브랜드가 되는 법에 대해 여러분도 곰곰이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