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쓸 말이 많아질 줄 알았다. 뱉지 못한 말이 많아서 더 밀도 있는 글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면 생각과 감정들의 과부하 때문일까, 그것들이 단어로 튀어나오는 것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기분이나 상태를 설명하는 단어를 쉬이 고르지 못하겠고 막연하게 떠오르는 단어는 아무 깊이 없이 고른 껍데기처럼 보였다. 노트북을 열어서 글을 쓰려다가 몇 번을 지웠고 내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 하나 고르지 못하는 나는 생각 없는 바보같이 느껴졌다. 분명히 내 안에는 많은 생각들이 들어있는데 도대체 왜 이럴까, 아무 답을 찾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의미 없고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이런 날들이 이어졌다.
몇 주 전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던 자리가 있었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그 사람 앞에서 나는 맥주를 두 병이나 마셨고 어느 정도는 나의 고민이나 바람을 털어놓았던 것 같다. 오랜만에 속 깊은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단 두 병을 마시고도 술이 달아올랐다.
"나랑 함께 해요."
"나도 많이 도와줄 테니,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줍시다."
뭐 이런 말들을 하면서 그 사람에게 기대고 기대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쓸데없이 가벼운 말들과 심각하지 않으려 고심한 무거운 말들을 쏟아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미 지나온 터널의 잔상이 그리는 긴 선과 그 길을 달리며 만들어 내는 덜컹거리는 소음들 속에서 무언가 후련함을 느끼며 이 기분을 글로 써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역시 말을 하고 나니 정리가 된 기분이야, 아무 말이나 막 뱉어냈지만 뭐가 필요한 생각인지 뭘 버려야 하는 감정인지 알게 됐으니까. 나는 다시 '쓰는 인간'이 되어야지 결심했다.
그러나 그다음 날 글을 쓰려고 막상 노트북 앞에 앉으니 또 나의 마음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써봐야지.(내가 너무 소심하게 보이려나.)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써봐야지.(내가 해야 할 일이 너무 사소해 보이는 것 같아.)
내가 하지 못해서 속상하거나 아쉬운 일에 대해 써볼까.(아 정말 내가 너무 없어 보인다.)
갑자기 너무 피곤해졌다. 조금만 누워야지 하다가 잠이 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 날들이 주우우욱- 이어지다 보니 글을 쓰지 않는 나는 그냥 게으른 인간이었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다. 나는 게으름을 감추려고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생각의 병목현상 때문일 거라고 나를 세뇌시키고 있었던가!
어제 친구들을 만나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이제 정말 써봐야지, 쓸 테야, 쓰고 말테야!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오늘은 커피숍에 노트북을 들고 왔다. 그렇지만 또 한참을 아무 의미 없이 인스타를 멍하니 보고 연예인들의 가십을 찾아보다가 이러면 안 돼,라는 뒤늦은 후회를 하고 브런치에 접속을 했다. 뭐라도 써야지, 그러고는 이런 정리 안된 글을 써본다.
오늘은 2023년 마지막 날. 별 거 아닌 낙서뿐인 글이지만 쓰긴 썼다. 사실 매번 결심만 하고 지키지 못한 그동안의 나에게 욕을 날려주고 싶지만 마무리는 한 셈이니 오늘은 꾹 참자.
내년에는 조금 더 나은 글이 나오길, 글 쓰는 감각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기를, 생각이 많기만 하지 무얼 생각하는지 모르는 날들이 없기를 절실하게 소망한다. 내년에는 글도 쓰고 잘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