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막내가 재미있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퇴근 후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한강까지 걸어가는 '투어'였다. 함께 러닝을 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한강에서 맥주 한잔을 하는 것이 투어 개최자인 막내의 처음 계획이었으나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투어'에 참여하게 되어 계획은 변경되었다. 다 함께 한 시간 거리의 한강까지 걸어가서 돗자리를 펴고 봄밤의 한강을 즐기는 것이 이 투어의 목적이 되었다. 우리는 돗자리를 준비하고 함께 할 레크리에이션을 준비하여 마치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회사에서처럼 날카로운 칼을 벼리를 시간이 아닌, 퇴근 후 가봐야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이 아닌 어쩌면 서로에게 어떠한 이해관계도 적용되지 않을 편안한 관계로서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원래 걷고 산책하고 바람과 햇볕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왠지 젊은 친구들과 함께 그곳을 즐기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회사에서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고 회사 친구들과 나의 나이 차이는 거의 스무 살 가까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들과 벽과 칸막이가 없는 자유로운 야외에서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해관계를 벗어던진다면 그들과 나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가끔은 내 생각과 표현이 그들에겐 구닥다리 같고 아무도 보지 않을 책장 속 바스러질 책과 같은 오래된 물질 같은 것처럼 느껴질 것 같기도 했다. 한창 자라고 있는 푸른 나무와도 같은 그들과는 다른, 언젠간 나무였지만 지금은 오래되어 누렇게 바랜 책이 되어 버린...
이런 생각 조금은 위험할 지도 모르지만, 그냥 늘 나는 나대로 하면 된다고 다짐하지만, 왜 그런지 가끔은 이런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그래도 나는 이 투어를 기대하고 즐길 준비를 했다. 한강까지 걸어가기 위한 운동화(늘 운동화를 신지만), 혹시 더워질 수 있으니 티셔츠(쿼카가 그려진 귀여운 티셔츠를 샀다), 편안히 입을 수 있는 바람막이 점퍼(남편 옷을 몰래 입고 갔다), 땅에 막 굴려도 좋을 가방(그래봐야 자주 드는 프라이탁), 많이 먹을 수 있을 크고 튼튼한 위(매일 그렇지만), 가벼운 입(평소라고 무겁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날의 일정 중 하나인 쓸데없는 선물교환을 위한 ‘책’ 선물.
‘쓸데없는 ‘ 이란 주제에 꽂힌 나는 무엇을 준비할 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다이소에 가서 이것저것 잔뜩 사서 박스에 담아 줄까, 하나의 성별에만 필요한 물건을 골라서 1/2 확률로 일어날 재미를 만들까, 아니면 절대 쓸데없지 않을 일용한 양식을 준비할까. 그런데 결국 내가 고른 것은 책이었다. 분명 ‘쓸데없는’인데 또 나는 책을 고르고야 말았다.
내가 왜 쓸데없는 선물로 책을 골랐는가 하면 선물을 산 그날이 하필 책의 날이었고, 연차였던 그날 나는 하필 책을 읽었고, 하필 그날 국어학원에 아이들 레벨테스트를 하러 갔다가 믿었던 아들의 점수가 너무 낮아서 입학불가라는 통보를 받았고, 그래서 하필 나는 아이들에게 책 좀 읽으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그런 후 하필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라면 내 책을 받은 누군가는 왜 ’하필‘ 책이야, 란 푸념을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쓸데없을 테니까. 이런 수많은 ’하필‘들이 모여서 나의 선택은 책이었다.
웃고 즐길 선물이 아닌 책이라니... 젊은이들과 어우러지려 노력한다는 나의 사회생활신조와 맞는가! 왠지 구닥다리 같고 꼰대 같고 젠체하는 어르신 같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책을 선물하는 것이 좋다. 책 선물을 받는 것도 좋다. 주고받는 물질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생각과 성격과 마음을 전달하는 것과 같아서 좋다. 재미있는 책이라면 지금 나의 기분을, 특정 주제에 대한 책이라면 나의 관심사를, 진지한 책이라면 나의 마음을 책과 함께 주는 것 같다.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로 그 책을 선물하는 상대방의 일부를 전달받는 것 같다. 표현에 서툰 내가 더 깊은 관계로 진입하기 위해 책을 촉매로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소심하고 구닥다리 방식으로. 그래서 나는 책을 그렇게도 선물하나 보다.(물론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요즘은 마음을 선물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싫다고 하던데, 나는 부담스러운 선물을 주고받는 걸 좋아하니 평생 어렵고 무겁게 살아갈 운명일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 앨리스미스의 '가을'에서는 대니얼이 항상 이렇게 인사를 했다. "안녕. 뭘 읽고 있니?" 나도 책을 선물할 때마다 생각하는 말이다. "안녕, 지금은 이걸 읽어줘."
"언제나 뭐든 읽고 있으렴. 물리적으로 읽지 않고 있을 때도. 그러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읽을 수 있겠니? 상수로 생각해." 대니얼이 하는 말처럼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언제라도 좋으니 이 책을 꺼내서 읽어줘. 세상을 혼자 읽는 것보다 같이 읽으면 좋잖아."
나는 함께 세상을 읽어갈 사람을 책을 선물하며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나는 이런 세상을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나와 함께할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지도.
구구절절 많은 말들을 써 놓아서 나의 책 선물이 무겁게 느껴지겠지만, 이 날 내가 선물한 책은 ‘아무튼, 술’로, 읽으면서 너무 즐거웠던 나의 기분과 내 인생 최대 관심사, 술에 대한 나의 진지한 마음을 모두 전달한 것과도 같다. 이 책을 아신다면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