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섶(5/6)

[쉼 소설]

by stamping ink

5. C


기차는 방송으로 여러 개의 역이 지나갔음을 알려 주었지만 그녀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출발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그녀들의 이야기는 만개했다. 하지만 20분 뒤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말이 들릴 즈음에서야 구겨진 여러 맥주 캔을 보며 도착할 때가 된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술이 약하던 C는 방송이 나오자 방송을 들으려 잠시 멈춘 대화 사이에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A야, B야...그리고 민이 씨...난 어려서 별명이 요조숙녀였어. 좋게 불릴 때는 그랬고, 아닐 때는 새침데기라던가, 뒷방 여우라 불리기도 했어. 다들 날 그리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아. 난 너무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참는 법만 늘었어. ”

“우리 C가 취했구나? 평소에 자기 이야기는 잘 안 하던 애가...”

C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A가 말했다.


“나 술이 원래 약해서... 딸꾹. 헤헤헤. 근데 들어줄래? 난 부모 없이 자랐지. 그래서 형제 많던 남자가 그리 좋아 보이더라. 남편을 만나고 북적거리는 것이 새롭고 신기해 보여서 결혼을 했어. 처음엔 좋았지. 근데 가지가 많으니 바람이 잘 날 없다더니. 특히 시어머니는... 딸꾹... 부모 없는 내게 내가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상상해보지도 못한 엄마의 모습으로 다가왔어. 혼내고 꾸지람을 하고, 가르치셨지. 많이 힘들고 많이 울었어.”


“그래. 너 시집가서 처음에 고생 많이 한 거 알아. 우리가 그렇게 말렸는데 처음으로 네 고집 세우던 때라 우리도 더는 말리지 못했지.”


오랜만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C를 위해 모두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언제 마셨는지 모를 사이에 몇 개의 맥주 캔을 비워낸 C의 손에 쥐어진 바닥에 조금 남겨진 맥주를 자연스럽게 가로챈 A는 C가 더 이상 마시지 못하게 입안에 다 넣고 캔을 구겨버렸다. 민 역시 C가 토해내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도움이 된다면 들어주고 싶어졌다. 알코올이 주는 즐거움에 취해버린 C는 좌우로 몸을 천천히 흔들며 눈을 감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내가 선택했지. 신혼이 시작되기 무섭게 시댁의 잣대가 매섭더라. 난 착한 며느리 병에 걸렸나 봐. 어른들 말에 순종하며 처음엔 이런 느낌이 학창시절 아이들이 말하던 부모님의 잔소리였구나 하곤 스스로를 달랬어. 뭐든 부응하고 싶었어. 원하시던 손주를 낳았는데 딸 하나 낳으니 바로 아들을 원하시더라. 축복받아보지 못했어. 아들을 원하셨거든... 딸꾹. 그리고 아이가 더 이상 생기지 않으니 그건 내 탓이 되어버리더라. 딸꾹. 딸이라 부르던 시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자기 말 듣지 않는 딸 대신 자신이 원하는 딸로 만들려 하셨어. 주변에선 나이 들면 어른들 기가 빠질 거라 기다리고 참았어. 그렇게 20년이 흘렀어. 며칠 전에 전화하셔서 생활비를 올려보내라 하시더라. 맡긴 돈 달라는 듯 말씀하셨어. 내가 조금 주저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독설을 날리시더라. 부모 없이 커서 정 없는 것이 어디서든 티가 난대. 하루 종일 울었어. 딸꾹. 남편은 어르신이니까 젊은 우리가 참아 견디자 하더라고. 근데 어쩌면 나보다 더 오래 사실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리니 억울해졌어. 매달 시부모님께 보내드리며 졸라매던 허리띠가 이젠 끊어져 버렸어. 그래서 평생 안 가본 백화점 명품관을 어제 갔다? 딸꾹.”

배려하듯 셋은 C의 이야기에 귀를 모았다. 멋쩍게 웃으며 C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의 손잡이를 검지로 쓸어 만졌다.


“이게 그거였구나? 평소에 이런 가방 안 들고 다니던 아이가 무슨 일 인가했다.”

가방을 보며 B가 이야기를 하자 C가 고개를 저었다.


“백화점엘 갔지. 몰랐어. 명품관이라는데 들어갈 땐 줄 서서 들어가야 한다는 걸... 딸꾹. 하얀 장갑 낀 직원이 다가와서 찾는 물건이 있냐고 물었지. 가방마다 이름이 즐비하게 있는데 뭐라 이야기할 수 없어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들고 다니던, 동네 엄마들이 들고 다니던 것이 생각나서 그걸 말했어. 직원이 베이직 한 걸 좋아하시냐는 말이 칭찬 같으면서도 비꼬는 것 같기도 해서 기분이 묘했어. 가방이 내 눈앞에 오긴 왔는데 내가 생각한 금액보다 0이 하나 더 있더라고. 딸꾹. 허영을 떨고 나면 나중에 후회하거나 뒷감당은 내가 하게 될 걸 알고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도망치듯 나왔어. 내가 불쌍하더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상가 한구석에서 SS급이라며 비슷한 가방을 파는 것이 보였어. 가방을 열어 로고를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할 정도의 제품이래. 짝퉁 주제에 비싸게 부르더라. 딸꾹. 물론 진짜보다는 0이 몇 개 빠지긴 했지만...”


술기운이 힘든지 C는 옆자리의 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미안해하는 표정의 A, B에게 눈으로 괜찮다고 말을 하곤 그녀의 가방을 보았다. 모조품이라고는 하지만 가격대가 있는 가방이라며 조심스레 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다.


기차 안에선 10분 정도면 종착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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