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바리(1/5)

[쉼 소설]

by stamping ink

올해 배추 농사는 풍작이다. 널찍하게 심어둔 배추는 영양분을 충분히 받아 튼실하게 자라났다. 농사꾼 자리를 내어놓으며 욕심도 내려놓았다. 내 식구들 입에 넣을 만큼만 뿌리고 거두니 농사꾼의 고단함이 베인 흙도 쉼을 즐기는 듯하다. 뽑아둔 배추를 집 앞마당에 쌓아두니 제법 높다. 굵은 마디, 무뎌진 손으로 배추의 꽉 찬 속을 반으로 베어냈다. 노란 속을 내보이며 갈리는 배추를 잡아든 뭉뚝한 나무 손잡이를 가진 식칼을 내려봤다. 작년만 해도 수저 아니고서는 주방 살림을 손으로 만져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손에 쥐다 보니 농기구 잡듯 달라붙어 있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배추 무딘 식칼을 집어 던져버렸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개비 입에 물곤 서걱 소리 나는 일회용 라이터를 힘껏 돌렸다.


‘아이고. 음식에 냄새 배요. 제발 여 근처에서는 피지 말라니깐...’

담배 한 모금을 뿜어내자 따갑게 울리던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땀 냄새가 진동이네. 뜨신 물 데워났으니 빨리 씻으시구려.’

그리 듣기 싫었던 잔소리가 그리워 연거푸 담뱃불을 밝혔다.


풋고추 몇 개, 된장과 김치가 점심 밥상에 올려있다. 홀로 먹는 밥이 무슨 맛인들 날까. 국그릇 겸 물그릇에 담긴 물 한 사발을 식사의 시작을 알리듯 들이켰다. 50년 넘게 밭일, 논일 가리지 않고 만지니 이젠 식탁 위 젓가락 하나 쉬이 잡아들지 못하는 모습이 처량하다. 두 해전, 떠난 아내가 시계처럼 차려 준 끼니 때문에 먹는 것이 귀찮아도 시간이 되면 뱃속이 요란하다. 기껏 차려 놓은 젓가락을 스테인리스 반상에 소리 나게 던져버렸다.

‘망할 할멈. 차려주려면 내 제삿밥까지 차려주고 떠날 것이지...’


진달래 가득 피어오르던 계절, 흰나비처럼 팔랑이는 저고리를 나부끼던 소녀는 내 곁에 날아와 아이도 낳고, 허리 굽으며 옆자리를 지켜주다 재작년 기침 몇 번과 함께 다시 날아갔다. 서글피 울어대는 자식들 앞에서 탁주만 들이키며 잘 날아가라 하늘만 바라보았는데 오늘따라 짙게 그리움이 밀려온다.

시골에 널려있는 지푸라기로 배추를 두 개씩 짝 맞추어 묶어 쌓아올리다 보니 어느새 제법 높이 탑이 쌓였다. 혼자 묶어대는 손이 더디기만 했지만, 시간을 묶어버리기에는 괜찮은 일이었다.


“삐용 삐용~”


산길 끝에서 먼지가 뽀얗게 솟아올랐다. 달구지 다니던 길도 이젠 시멘트로 다져져서 둔탁하지 않은 길이지만 붉은색 경광등이 요란한 차가 언덕을 넘어 내려왔다.


“이제서야 오는구만.”


중얼중얼 내뱉은 주름진 입가에 담뱃불이 다시 붙었다. 마당 한 편의 주인 잃은 독은 이웃 마을까지 소문난 장 내음을 잊고 처량 맞게 서 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치면 깨끗하고 착한 큰 독을 골라 마당 깊이 묻어주었다. 양옥과 철 대문이 오묘하게 어울린 마당 안 구석엔 독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었다. 아내는 독을 닦고 또 닦았다. 누군가의 눈에는 항아리이지만 아내의 독은 보물이었다. 깊이 빨아들이는 붉은 담뱃불 끝을 따라 아내가 아끼는 독 위에, 작은 꽃밭 옆에, 텅 빈 외양간은 슬피 울며 떠난 송아지 대신 여물통 위에 비슷한 또래 아낙들이 구토와 섞인 토사물을 쏟아낸 채 쓰러져있다.


“으...웩~”

담배가 끝까지 타 내려가기 전에 속에서 붉은 핏물이 솟구친다. 비릿하고 짙은 피맛이 입안에 가득하다. 입가에 핏물이 줄줄 타고 흐르건 말건 담배를 당겨 마지막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드린다. 폐 속까지 핏물과 연기가 섞이자 이른 낮 피곤함에 노긋한 꿀잠이 밀려온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크 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