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지만, 눈물이 날 것 같은
아침 일찍 삶은 루틴대로 움직였다. 다섯 시 오십 분에 기상해 평소대로 수목원길을 따라 산책하고, 그윽한 연기를 내뿜는 인센스를 피우며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읽었다. 보통이라면 출근 시간인 여덟 시 십 분 즈음 끝날 루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긴 호흡을 내뱉고 다시 한번 책에 집중했다.
내 삶은 2023년을 기점으로 크게 달라졌다. 회사원에서 프리랜서로의 삶을 살기로 했으니까. 2022년은 나름 행복했다. 하고 싶은 일을 했고, 즐거운 것들로 가득 채웠다. 물론, 불만도 많았고, 먼 미래엔 프리랜서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게 올해가 시작되는 때는 아니었지만.
조금 일찍 찾아온 달라진 삶. 머리는 꼬여버린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역시나 꼬인 실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지금. 이는 즐거운 일로 변모해 바뀐 일상을 걱정하기보단 기대하기로 했다. 책을 덮는 시간이 늦어진 것처럼 달라질 여러 변화를.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양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오늘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휴가'가 내포된 일정. 변화된 일상에도 적응기가 필요했던 나는 조금은 가볍게 하루를 시작하고, 정리하고, 마무리하기로 했다.
휴가는 결핍을 채우는 것에 쓰고 싶었다. 오랫동안 바쁘게 달려온 내게 결핍처럼 남은 여유. 습관처럼 급해지는 마음이 이에 대한 방증이겠지. 어떻게 하면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여유를 부릴 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고민 끝에 떠오른 '그래 맞아, 나는 영화를 봤어'라는 충동적인 생각은 어느새 영화표를 예매하게 만들었다. 얼마 전부터 볼까 말까 고민했던 진부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일본 영화를.
영화를 보고 나서 내뱉은 한 마디다. 하지만, 웃긴 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사랑 이야기가 다 그렇겠지. 몽글한 감정이 어느새 땅에 뿌리내리고 꽃을 피운 뒤, 화려하게 빛나다 급격히 시드는 게 사랑이니까. 감정도 보존의 법칙이 있듯, 마음을 내어 준 만큼 아픈 게 사랑이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진부한 모든 것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음을. 그래서 눈물이 났다.
영화를 본 뒤, 약간 남은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간단히 식사를 취한 뒤 새로운 환경에 맞게 일을 했다. 영화의 여파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변수와 모험 때문일까. 하루종일 몽글한 기분은 일하는 과정을, 아니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 모든 것도 일상이 되겠지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올해는 쳇바퀴 돌던 작년과는 다를 거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그러며 눈을 살포시 감고 소원 하나를 빌었다.
'올해의 일상도 사랑만큼이나 진부하길 바라. 그럼 눈물 날 만큼 행복할 거야'
2023.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