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의 심리학: 착한 엄마의 삶

by 황준선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다양한 역할을 맡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 배우자, 혹은 자녀로서 각자의 책임과 역할을 수행하게 되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10대 자녀를 둔 부모라면, 전통적인 가치관을 무조건 따르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가족과 자신의 삶을 철저히 분리해 쿨하게 살지 못하는 딱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흔히 말해, ‘착한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 말이죠.


좋은 엄마의 일상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뜹니다. 아이들을 깨우고 아침밥을 준비한 뒤, 각자의 하루를 시작하도록 챙깁니다. 학교 갈 준비를 돕고, 아이들과 남편이 집을 나서면 청소와 장보기 같은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후엔 학부모 단체 채팅방에서 올라온 글도 보고, 중간에 음식물 쓰레기 버릴 때가 되었나 확인도 해야 하죠. 매일 해도 티가 안 나는 청소도 하고, 오늘은 마늘도 까는 날입니다. 출출하니 남은 김밥을 계란에 묻혀 전으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면 가족과의 저녁 식사가 이어지고, 또다시 설거지를 하죠. 남은 집안 정리를 하고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몇 개 보다 보면 하루가 금방 끝나갑니다.


어느 날, 하루의 끝에서 문득 생각이 스칩니다. "지금 이 나이에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였을까?" 분명 별 문제가 없는 일상이지만,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삶이 마치 자동 조종 모드로 흘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아이의 말에 비친 나

어느 날, 초등학생 딸이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이번 주말에 친구 생일파티 가도 돼? 아빠가 괜찮다고 하면?” 순간, 멍해졌습니다. 왜 아이는 아빠의 허락을 먼저 떠올렸을까요? 그 질문은 나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늘 모든 일에서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아빠의 의견을 우선하며 자신의 생각은 뒤로 미뤄왔던 내 모습이 아이에게 그대로 비쳤던 걸까요?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일 수도 있는 딸의 물음이 마치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작은 변화, 나를 위한 선택

그날 이후,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부의 일상 Vlog를 찍는 유튜버가 되어볼지, 지난번에 그만뒀던 필라테스를 다시 끊어야 하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또 저녁 시간이 되었고, 그렇게 또 며칠 몇 주가 흘렀습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모를 찝찝한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시도하지만 여전히 헛헛한 마음

아침 알람 소리에 일어나는 일상은 변함없지만, 이번엔 스스로 정한 작은 목표들을 정했습니다. 아침 준비가 끝나고 가족들이 집을 떠난 뒤, 집안일 전에 10분간 산책을 나갔습니다. 겨울 공기가 차갑지만, 걷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또 저녁이 끝난 뒤에는 책을 펼쳤습니다. 예전엔 읽고 싶다고 생각만 하던 책들. 이번엔 진짜 실천에 옮겨 한 권씩 읽어 나갔습니다.


몇 주가 지났습니다. 산책은 일상이 되었고, 책 읽는 시간도 즐거워졌습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나는 정말 변한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하는 일들에 또 다른 루틴을 추가했을 뿐일까?"


좋은 말들을 실천했지만, 내 삶에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가족 중심으로 돌아가는 하루. 여전히 내가 나의 중심이라기보다는, 가족의 요구를 맞추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느낌. "내가 뭘 더 해야 하지? 내가 하고 있는 건 충분하지 않은 걸까?"


하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엄마도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생 딸과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엄마, 이번 주말에 친구랑 코인노래방 가도 돼?” “그래, 다녀와도 돼. 그런데 이번엔 아빠가 아니라 엄마한테 물어본 거네?”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그 순간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딸이 ‘엄마’라는 역할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그 믿음은 어쩌면 내가 늘 맞춰주는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날 밤, 나는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보며 나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내가 꿈꾸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가족을 위해 충실히 사는 것도 좋지만, 나는 과연 내 삶에서 주인공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가족 모두가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길 바라면서, 정작 나는 그저 조연처럼 그들을 돕는 역할에 머물러 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정한 좋은 엄마가 되려면, 아이들과 남편이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뿐 아니라, 엄마인 나 역시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걸.


눈치를 안 보는 게 아니라, 잘 보는 삶을 살기

그 다음날 아침, 가족들이 집을 나간 뒤 나는 오랫동안 미뤄뒀던 필라테스를 등록했습니다. 그저 체형 관리나 건강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작은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번엔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엄마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어. 한 번 맛있게 먹어보자.”


주말엔 처음으로 남편에게 가족 일정을 맡겼습니다. “이번 주말엔 내가 시간을 좀 가질게. 남은 시간은 아빠랑 잘 보내봐.” 남편은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습니다.


몇 달 뒤, 내 삶은 정말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상에서 특별한 행동이 추가되거나 빠진 것도 없었지만요. 가족들도 점점 더 주체적으로 변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항상 맞춰주지 않아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법을 배워 갔습니다. 남편도 내가 없을 때 더 능동적으로 가족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만큼만 눈치를 볼 수 있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엄마라는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좋은 엄마로 거듭나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중요한 건 일상에서 엄청난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걸 받아들이는 내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이 믿음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가장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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