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준선 Aug 03. 2023

선생님과 학부모의 공간, '학교': 그곳에 학생은 없다

양육 실종이 낳은 폐해

'학습권 침해'와 '교권 보장' 


이런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학습권 보장'은 학부모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단어다.


'교권 보장'은 선생님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단어다. 




학교엔 학생들이 없다.







교권을 보장받기 위해 


광화문에 선생님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호민이라는 인기 작가 겸 스트리머는


자폐 판정을 받은 자식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


교사를 고소했다.




교권과 학습권이 싸운다.




이 모든 싸움의 본질은 


학생에게 좋은 교육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어떤 아이가 주의력이 부족한 행동을 보인다고 해보자.




선생님 입장에서는 


바른 자세로 앉아있는 학생에게


국어와 수학 수업을 가르쳐야 할


'교권'이 침해 당하는 상황이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제시간에 진도를 나가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할


나의 자식의 '학습권'이 침해 당하는 상황이다. 




주의력이 떨어지는 학생을 나무라거나


격리시키는 것은,


해당 학생의 학부모의 입장에서의


또 다른 '학습권' 침해이다.




그러나,



선생님 쟤가 자꾸 돌아다녀서 
제 공부 하는 시간을 방해해요!



라고 얘기하는 학생은 없다. 




뭔가 이상하다.




정작 학생 본인들은 


선생님의 가르칠 권한이 침해되었거나


내가 수업을 들을 권한이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여나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물어보는 사람조차도 없다.




아이들은 


금방 자랄 몸과 발 사이즈에 맞게


조금은 헐렁한 옷과 큰 신발을 


귀엽게 신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 아이들은 온데간데없고


학부모와 선생님끼리


학부모와 학부모끼리


치고받고 싸운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의 명분은 


'아이들을 위해서'이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바로 교육에서의 '양육'개념의 실종 때문이다.


양육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거나


밥을 떠먹여주는 행위를 떠올린다.




그러나 양육은 그런 개념이 아니다.


양육(Nurture)은 이런 아래와 같은 개념이다.




Nurture allows children to connect with others, to build important relationships, and to develop a sense of self-worth. It helps them learn, play and communicate – and it is enabling children to thrive.


양육은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과 교류하고 중요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통해 자존감을 키우게 한다. 양육은 아이들이 배우고, 놀고, 소통하는 데 도움을 주며, 이를 통해 아이들이 성장 발전할 수 있도록 한다.




즉, 양육이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깨닫고, 


또 나와 다른 '특성', '성격', '취향' 등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아이 여러 명이 모였을 때,


그 속에서 서로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서로에게 어떻게 하면 상처를 주지 않는지, 


다투지 않는지 배우는 것이다.




또 이미 일어난 다툼은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배우는 것이다.




이런 양육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다양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잘 살아간다. 








양육은 '교육'이라는 아주 큰 개념에 속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교과서 속 내용을 배워서 암기하고 응용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




발달 교육이니


촉감 놀이니 하는 것도 유행이지만,


결국 '내 아이'가 그런 놀이를 통해 


더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더 중요한 건


놀이 센터에 가서



            슬라임을 '주무르는' 내 아이와          

            슬라임을 '입으로 무는' 이 아이와          

            슬라임을 '던지는' 저 아이와          



어떻게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것인데 말이다. 




양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커서


성인 ADHD 라거나 


전화가 무서워서 받지 못하는 '콜 포비아'네 하는 골 때리는 세상이다. 




학교는 학생의 것이다.


학생에게 양육을 돌려주자.




선생님과 학부모가 외치는 '권리'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권리가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자폐'가 만들어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