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방법으로 민생 회복에 기여하기
뉴욕에서 대학원 과정이 끝나갈 무렵, 코로나19가 시작되었다.
세상이 멈췄다.
상점들은 하나둘 셧다운을 내렸고 사람들은 집 안에 머물렀다.
그때 나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일종의 반항심이었을까...?
셧다운이라는 조치가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의 공포를 심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코로나가 주는 증상의 불행함이 아니라,
코로나의 정체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것 같았다.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보다 불행한 현실을 선택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불확실성이 가진 공포가 당장의 불행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사회적 결정을 따르는 것 또한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인 법.
그래서 불만을 품는 대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푸드 패키징 봉사였다.
수많은 기부 단체와 기업들이 제공한 생필품들을
일정 기준으로 분류하고 포장하는 일이었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소외된 이웃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렇게 사회가 정한 합의를 따르면서도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을 행동으로 지킬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수년의 시간이 흘렀다.
민생 회복을 위한 소비 쿠폰이 지급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내게도 15만 원어치의 쿠폰이 지급됐다.
결제할 때마다 잔여 금액이 차감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15만 원은 누구에게나 큰돈이다.
그런데 이때,
뉴욕에서 코로나를 마주할 때 느꼈던 그 느낌이 함께 들었다.
민생 회복 쿠폰의 취지에 동의한다.
그 효과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하는 쪽에 가깝다.
소비가 진작되고, 시장에 역동성을 공급하고, 희망을 갖게 되는 것 등—
쿠폰에 적힌 금액의 숫자에 담긴 그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취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쿠폰이 발행되었으니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나답게' 사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돈을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민생 회복이라는 본래 취지에
조금이라도 더 부합하는 방법을 찾아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었다.
기부처를 찾다가 가까운 푸드뱅크를 발견했다.
기부 금액과 방식에 대해 소통하며 그곳에서 가장 필요한 품목들을 알려주었다.
3분 짜장, 3분 카레, 그리고 런천 미트를 가족과 함께 30만 원어치 구매했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그곳에는
나 같은 개인 후원자들의 물품부터
기업에서 후원한 각종 생필품들이 가득했다.
샴푸, 칫솔, 모자, 쌀, 고추장, 소금과 설탕 등 살면서 꼭 필요한 물품들이 빼곡했다.
이곳에 후원된 생필품은 저소득층이나 노약자에게 전달된다.
개인후원자는 물건을 구매하고 직접 방문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더 직관적으로 와닿는 기부 방식이라 마음에 들었다.
담당자가 이 단체에 대해 설명하면서
연신 고마움을 표현하고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도 주었다.
소비 쿠폰을 전액 기부한 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그리고 민생 회복 쿠폰을 보람차게 사용했다는 만족감만큼,
나다움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뿌듯함도 컸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게 더 맞지 않나?'라는 의문에
행동으로 답을 찾은 셈이었다.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평소에 기부를 자주 하지도 않고,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한테 쓰고 싶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부에 동참하면 좋겠다"는 식의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이건 내가 원해서, 나답게, 내 식대로 결정해서 한 행동이었다.
지금 상황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싶지 않았고,
완강히 거부하고 불만을 표출하기보다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실천하는 의미 있는 선택이기도 했다.
민생 회복에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한 마음도 진심이다.
후원한 생필품을 사용하는 분들이
이 글의 콘텐츠를 제공해 준 것이니,
사실 서로 도와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게 전부다.
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고,
그저 내가 선택한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