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서는 법을 배우는 하루
정신안전센터 차량이 사라진 뒤에도
주상의 심장은 한참 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초록불 앞에서 발을 내디뎠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초록불.
진행.
그래야 맞는 거였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왜… 모두가 정지했지?
“괜찮아요?”
지후가 다시 말을 건넸다.
주상은 대답 대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호흡이 턱 끝에서 떨렸다.
“아직도 믿기지 않죠.”
지후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잔잔하게 말했다.
주상은 조심스레 물었다.
“… 정확히, 뭐가요?”
지후는 신호등을 가리켰다.
“저거요.
원래는 초록불에 건너는 게 맞아요.”
그 순간,
주상의 속이 쑥 꺼지는 듯했다.
누군가 그 말을 대신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 그런 말을 해버리는 것이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근데 말하면 안 돼요.”
지후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둘만 있으니까 괜찮지만, 사람들 들리면 곧바로 신고 들어갑니다.”
“그럼… 아까 그 여자도…그래서?”
“맞아요.
당신 말 한마디 때문에 잠재의식이 튀어나온 거예요.”
주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재의식…?”
“엔트로피 반전 사건 이후, 사람들 머릿속엔 이전 세계의 감각이 아주 깊게 숨어 있어요.
겉으로는 다 잊은 척 살아도,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하죠.”
지후의 설명은 담담하지만 무게가 있었다.
“그게 바로 역각성입니다.”
그는 단호했다.
“당신이 방금 ‘초록불엔 건너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말했잖아요?
그 말이 그 여자 잠재의식을 건드려서… 혼란이 온 겁니다.”
주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세상이 뒤집혔다는 걸 아는 사람은… 티를 내면 안 되는 거군요.”
“맞아요.”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고 싶다면, 티를 내지 마세요.”
“이제, 기본 연습부터 합시다.”
지후가 손으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주상은 멍해진 상태로 뒤따랐다.
도시의 오후.
거리에는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비정상적인 규칙’을 모두 따르고 있었다.
빨간불에 건너고,
초록불에 멈추고,
역주행하는 사람에게 길을 비켜준다.
식당에 가면 고객이 가격을 정했다.
주상은 머리가 아파왔다.
지후는 골목의 작은 카페 앞에서 멈췄다.
“첫 번째 훈련이에요.”
그는 문을 가리켰다.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서…
당신이 ‘손님’이라는 사실을 잊는 겁니다.”
“… 뭐라고요?”
“여기선 손님이 계산받아요.
직원이 계산하고.”
주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후가 미소를 지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반대로 생각하면 돼요.
세계 전체가 잘못된 거니까,
틀어맞추는 데 시간이 좀 걸릴 뿐.”
그들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아늑한 조명, 조용한 음악.
사람들 몇 명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바리스타가 고개를 숙여 말했다.
상냥했다.
그러나 그다음 말은 뒤틀린 세계의 규칙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손님, 오늘은 어떤 금액으로 결제받으시겠어요?”
주상은 얼어붙었다.
지후가 옆에서 속삭였다.
“진정하세요. 당신이 결제받는 사람이에요.”
“아… 음…”
주상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천 원 정도…?”
바리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오늘은 손님께 천 원 드리고,
아메리카노는 제가 결제하겠습니다.”
그녀는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뒤이어 바리스타가 컵을 건네며 말했다.
“손님, 오늘도 적게 가져가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은 너무 많이 결제받으려는 손님이 많아서요.”
결제받는다.
감사하다.
아메리카노 값을 직원이 낸다.
주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은…
농담도, 장난도 아닌
이 세계의 ‘정상’이었다.
카페를 나서고 난 뒤,
주상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 이게, 진짜 현실인가요?”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에선 그래요.
그리고 당신은 이제, 이것이 정상인 척 살아가야 합니다.
아니면”
그는 아까 봤던 정신안전센터 차량이 사라진 거리를 가리켰다.
“저 차가 다시 당신을 찾게 될 겁니다.”
“두 번째 훈련입니다.”
지후가 갑자기 말투를 바꾸며 말했다.
“이제 길 건널 때 연습해요.”
주상의 얼굴이 굳었다.
“초록불이면?”
“… 멈춘다.”
“빨간불이면?”
“… 건넌다.”
“좋아요. 자, 신호 바뀌면 나만 따라오면 돼요.”
신호등이 바뀌었다.
빨간불.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한다.
주상은 한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빨간불에
발을 내디뎠다.
마침내 그는
거꾸로 흐르는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을 배운 것이었다.
지후는 걸으면서 말했다.
“이건 단지 시작이에요, 주상 씨.
곧 알게 될 겁니다.
신호체계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이 전체 세계의 앞뒤가, 완전히 뒤집혀 있다는 걸요.”
주상은 입술을 떨며 물었다.
“… 왜 하필… 우리만 알고 있죠?”
지후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우리만이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멈추지 않았다…?”
“엔트로피가 반전된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 세계의 기억을 놓아버렸어요.
그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마음의 자동 방어였거든요.”
지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그 순간 잠깐,
삶의 방향이 바뀌는 걸 인지한 사람들이에요.”
그는 주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절대 많지 않아요.
아주, 아주 드뭅니다.”
주상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속삭였다.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하죠?”
지후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일단은 살아남아야죠.”
“그리고...”
그는 빨간불에서 멈춰 서 있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며 말했다.
“언젠가, 세상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아는 순간…
이 세계의 앞과 뒤를…
다시 뒤집을 방법도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주상은 그 말을 들으며
처음으로 ‘희미한 가능성’을 보았다.
거꾸로 흘러가는 세상.
그 속에서 살아남는 자들.
그리고,
이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작은 시작.
그들이 함께 걸어가는 빨간불 위 횡단보도는
마치
‘정상으로의 역행’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