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버릴 수 없었던 것들이 밤마다 돌아올 때
밤이 깊어지면 돌아오는 것들이 있다. 한때 되고 싶었던 것. 가보고 싶었던 곳. 만나고 싶었던 사람. 낮에는 잊고 사는데, 새벽 두세 시쯤 되면 어김없이 돌아온다. 현실이라는 말 한마디로 접어둔 것들이, 다림질한 셔츠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메모처럼 다시 나온다. 오늘은 그 밤의 감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시인 이야기를 한다. 가난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한 젊은이를 위해 쓴 시.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1936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다니던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면서 스물한 살에 문단에 나왔다.
그리고 10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정규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광산을 떠돌았고, 댐 공사장에서 보름씩 신세를 졌고, 행상하는 친구를 따라 장터를 돌았다. 동네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끼니를 이었다. 가난은 비유가 아니라 그의 일상 그 자체였다.
1965년, 절친한 시인 김관식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온 뒤에야 다시 펜을 들었다. 1973년 첫 시집 <농무>를 자비로 출간했다. 낼 곳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이듬해 제1회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경쟁작이 박경리의 <토지>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시인이 50대가 되어서도 길음동 산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단골술집 주인의 딸이 한 청년을 데려왔다. 노동운동을 하다 지명수배를 받은 젊은이였는데, 신경림의 시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시인은 그 청년에게 결혼을 부추겼고, 결국 개척교회 반지하방에서 열 명 남짓한 하객 앞에 선 비밀결혼식에서 주례를 섰다. 그날 밤 시인은 두 편의 시를 썼다. 축시 <너희 사랑>과, 신랑의 마음을 헤아리며 쓴 <가난한 사랑 노래>.
2024년 5월 22일, 대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장례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시는 같은 구조를 네 번 반복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답은 정해져 있다.
모른다는 게 아니다.
다 안다.
외로움도, 두려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가난하다고 해서 그것들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낀다.
눈 쌓인 골목길에 쏟아지는 새파란 달빛.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집 뒤 감나무에 남아 있을 새빨간 까치밥.
여기서 '가난'을 지금 우리의 말로 바꿔보자.
"바쁘다고 해서."
"어른이 됐다고 해서."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해서."
외로움을, 두려움을, 그리움을, 사랑을 모르겠는가.
다 안다.
다만 모른 척하고 사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려야 한다.
이것이 이 시가 단순한 감상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시인은 위로하지 않는다.
"괜찮아, 꿈을 포기하지 마"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정확하게 짚는다.
안다, 다 안다, 그러나 버려야 한다는 것도 안다고.
이 정직함이 밤마다 돌아오는 감정의 정체다.
우리가 새벽에 잠이 깨서 천장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은,
꿈을 잊어버린 슬픔이 아니다.
꿈을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는 슬픔이다.
한때 되고 싶었던 것을 잊은 게 아니라,
잊지 못하면서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
그것이 진짜 무거운 것이다.
신경림은 이것을 1988년에 써놓았다.
노동운동 하다 수배당한 청년을 위해 쓴 시였지만,
결국 모든 시대의 모든 어른에게 닿았다.
가난의 모습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같다.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대학원을 접은 사람.
아이 학원비 때문에 취미를 정리한 사람.
월급날 통장을 보며 여행 계획을 미룬 사람.
버려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보통 이런 주제의 글은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로 끝난다.
그런데 신경림은 그렇게 쓰지 않았다.
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에서 딱 멈춘다.
희망도, 결의도, 반전도 없다.
그냥 안다고만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정직함 앞에서 마음이 놓인다.
"힘내"라는 말보다 "나도 알아"라는 말이 더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이 시가 수십 년간 읽히는 이유다.
버려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 그걸 안다고 말해주는 것.
그것만으로 새벽의 천장이 조금 덜 무겁다.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됩니다. 학창 시절 좋아했던 악기. 한때 꿈꿨던 직업. 가보고 싶었던 도시. 배우고 싶었던 언어. 지금 당장 다시 시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한 번 꺼내서 바라만 보세요. 아, 이게 아직 여기 있었구나.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 있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게 뭔지 댓글로 남겨주세요.
쓰는 순간 그것은 '버린 것'에서 '기억하는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