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다고, 그 노래가 대신 말해줬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음악감상실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돈을 내고 들어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음악만 듣는 곳.
화면도 카메라도 없이.
그 시대 사람이 아닌 나는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자료를 찾아볼수록 그 공간의 감각에 매료되었다.
명동 뒷골목, 지하로 열두 계단.
문을 열면 담배 연기와 원두커피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왔다고 한다.
천장에 매달린 대형 스피커 두 개가 방의 전부.
조명은 거의 없어서 옆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커피 한 잔이면 두 시간을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제야 알겠다.
그건 카페가 아니었다.
울어도 아무도 모르는 장소였다.
시청 앞 보험회사에서 타자수로 일하던 그녀는,
퇴근하면 곧장 그 계단을 내려갔다.
집에 가면 어머니가 맞선 얘기를 꺼냈고,
회사에서는 과장이 어깨를 툭툭 쳤다.
하루 종일 타자기 앞에 앉아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치면서,
정작 자기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당시 직장 여성들의 인터뷰에는 공통된 문장이 나온다.
"괜찮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괜찮냐고 물어봐서가 아니라,
아무도 안 물어보니까 스스로 그렇게 되뇌었다는 뜻이겠거니.
오빠가 군대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건강하냐, 밥은 먹고 다니냐.'
답장을 써야 하는데, 쓸 말이 없었다.
건강하다는 것도, 밥을 먹고 다닌다는 것도, 괜찮다는 것도...
전부 사실인데 전부 거짓말 같았다.
음악감상실의 어둠 속에서, 스피커가 울렸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스물셋의 그녀에게 이 가사는 떠난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좋아한다고 해놓고 다른 여자와 걸어가던 그 사람.
기다리라고 해놓고 연락 한 번 없던 그 사람.
사랑이 거짓말이었고,
그 사람의 웃음이 거짓말이었다.
김추자의 창법을 들어보면,
이 가사를 슬프게 부르지 않는다.
한국적인 로큰롤 리듬,
그 당시의 신디사이저 소리,
아주 약간은 따로 노는 기타와 드럼 박자 속에서
낭창하게 부를 뿐이다.
요즘은 항의, 공론화, 소송이 만연한 세상이다.
그런데 '거짓말' 같단 그 담백한 외침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던 세상에 내던질 수 있는
외침의 감성이었던 걸까?
커피가 식었다.
두 시간이 지났다.
계단을 올라가면 다시 네온사인이 보인다.
이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그 세대 여성 몇 분에게 이 노래를 다시 들려드린 적이 있다.
"지금 들으니까, 남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나한테 하는 말 같다."
대화를 하다 보니 이런 결론에 다다른다.
그때는 '네가 거짓말이야'였던 것이,
지금에는 '내가 거짓말이야'로 바뀌어 있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내가 거짓말.
힘들지 않다는 것도,
후회 없다는 것도,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낫다는 것도.
같은 가사인데,
그 사이에 30년이 쌓이면,
주어가 바뀐다.
'너'에서 '나'로.
가사는 한 글자도 안 변했는데 노래 전체가 달라진다.
"이상하게 슬프지만은 않더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오히려 조금 편해졌다."
괜찮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 노래가 대신 말해주니까.
김추자는 1971년에도 2025년에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듣는 귀만 달라져 있을 뿐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곳이 어디였나요?
음악감상실이었을 수도 있고,
라디오였을 수도 있고,
엄마가 설거지하며 흥얼거리는 소리였을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불쑥 띄워준 영상이 첫 만남이었을 수도 있고요.
저도 노래를 들으며 고개를 까딱거리며 글을 쓰고 있거든요.
이 노래를 같이 듣는다면
이런 질문을 드려보고 싶을 것 같네요.
"거짓말이야"라는 세 글자가,
지금은 누구를 향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