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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정영목 옮김|박영심 디자인씽커/이레

by 컬러코드

The Architecture of Happiness


나는 눈이 보이는 모든 것을 시각화하는 일을 한다.


환경디자인 전공 조교를 하면서 이래저래 건축이나 실내인테리어에 대한 서당개 3년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벌써 17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에 학과장님께 선물 받았던 책이다.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아마도 건축이야기를 에세이로 편하고 쉽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과연 2007년도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롭고 세련된 표현들이 한가득하다.


어릴 적부터 주택에 살아서 집에 대한 생각은 조금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같은 구조로 사람 위에 사람 자는 것이 싫다는 엄마의 생각을 모토로 절 때 아파트로 이사 갈 생각이 없던 부모님 아래, 계절별로 가구배치로 인테리어를 바꾸는 부지런한 부모님 아래, 매일 새벽 마당청소를 하신다고 물호수로 시원한 소리로 잠을 깨주셨던 기억으로, 화장실이 노래방인 양 큰 소리로 매일 노래를 부르고 새벽에 피아노를 치고 뛰어다녀도(좁지만 뛰어다녔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브랜드 있는 아파트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인 브랜드 주택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사는 가지않고 리모델링만 10번 넘게 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리모델링비만 보아도 집 한채는 샀겠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가정을 꾸린 지금은 결혼을 하고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내 생에 두 번 이사를 해봤다. 일단 부지런하지 못해서 주택에 살 엄두가 나지 않는건 사실이다.

아파트는 일단 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지만 분명히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우며, 아이들에게도 조심시키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일하는 건물에서 쇼핑하러 갔을 때 엘레베이터를 타 봤지 성격이 조금 급한 탓도 주택에 살아서일까, 아파트에서 엘레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러도 늦게 오는 엘레베이터가 답답하기만 하다.


왜 아파트는 땅과 멀어질 수록 가격이 높은 걸까...불편을 감수하고도 시각적으로 행복하기 때문일까..




1. 행복을 위한 건축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한 테라스하우스. 아까까지만 해도 이 집에서는 아이들의 외침과 어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두어 시간 전 마지막 남은 사람이 떠나자(작은 가방을 들고), 이 집은 홀로 아침을 음미하게 되었다. 맞은편 건물의 박공 위로 떠오른 해는 지금 일층 창문을 통해 밀려들어와 안쪽 벽을 버터 빛깔의 노란색으로 물들이며, 입자가 거친 붉은 벽돌정면을 따뜻하게 달군다. 햇빛 줄기 속에서 혈소판 같은 먼지들이 소리 없는 왈츠의 박자를 따라 움직인다. 현관에서는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가속 페달을 밟는 차량들이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끔 우편함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고 서글픈 느낌의 전단을 받아먹는다.(p1)

책의 시작단락이다. 너무나도 은유적 표현이 강해서 다시 읽고 의미를 새기고 또 새겨도 대단한 표현이다. 꼭 '김훈' 소설가가 생각난다. 이렇듯 건축에 대한 대단한 기술적 이야기보다는 에세이같이 감정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는 책이다.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의 감각을 무시하고 환경에 우리 자신을 무디게 만들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 또 한구석에는 우리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는 우리가 있는 곳과 지울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인정하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 우리는 이 모순되는 두 충동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의 지저분한 방을 보면, 평소 그 사람의 생활에 관해 품고 있던 어렴풋한 의심이 그대로 굳어 버릴 수 있다. 반대로 꿀 색깔의 석회석으로 둘러싸인 햇빛이 잘 드는 방은 우리의 가장 큰 희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다.(p13)


위대한 건축물을 창조하려는 야망을 의심할 이유는 부족하지 않다. 건물은 그것을 짓는 일에 들어가는 노력을 드러 내는 경우가 드물다. 그들은 파산, 자연, 자신들이 일으키는 공포와 먼지에 관해 수줍게 입을 다문다. 냉담한 외관은 자주 거론되는 그들의 매력적 특징의 하나다. 건물을 직접 지어볼 때에만 우리는 건축 재료와 공사 관계자들이 우리의 설계에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일, 유리 두 장이 깔끔한 선으로 만나 결합하게 하는 일, 등이 층계 위에 대칭으로 걸려 있게 하는 일, 필요할 때 보일러가 켜지게 하는 일, 콘크리트 기둥들이 지붕과 불평 없이 결혼하게 하는 일과 관련된 괴로움을 알 수 있다.(p16)


미스 반 데어 로에, 필립 존슨, 켄 셔틀워스 등 위대한 건축가들,,,

<논리철학 논고>의 저자이기도 했던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철학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2 어떤 스타일로 지을 것인가?


그리스인들은 고전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로마인은 그것을 복제하고 발전시켰으며, 천 년의 간격을 두고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교육받은 계급들은 이 스타일을 재발견했다. 고전주의는 반도로부터 북쪽과 서쪽으로 퍼져나가면서 지방색을 띠고 새로운 재료로 표현되었다. 고전주의 스타일의 건물은 헬싱키와 부다페스트, 서배너의 상트페테르불그크처럼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공존했다. 이 감수성은 실내장식에도 적용되었으며 고전적인 의자와 천장, 침대와 욕조가 탄생했다.(p30)

관찰력이 무조건 좋아야 하며, 크게 보고도 작게 보고 덩어리를 보면서도 섬세해야 하고 0.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얼마 전, 필리핀에 주택을 짓는다는 지인의 지인이 계셔서 색채계획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골프장 안에 주택을 짓는데 이미 어떤 스타일로 지을지,,, 재설계가 힘들게 주변의 스타일을 따라가고 있었다. 너무 튄다거나 촌스럽거나의 문제였다. 결국 그 주변의 스타일들로 그럭저럭 비슷한 스타일로 문안하게 지어진 듯했고, 몇 개 없는 재료에서도 선택을 하여 나름 만족하는 집이 설계되었다. 나는 코로나 시기라서 가지 못하고 온라인으로만 색채계획을 세워드렸지만 엄청 만족하셨다.


건축가들은 인도, 중국, 이집트, 이슬람, 티롤, 자코뱅 스타일의 집을 지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런 스타일들의 조합도 보여줄 수 있다고 자랑했다 이런 박식을 과시한 사람들 가운데도 가장 재주가 많은 사람은 험프리 랩넌이라는 이름의 영국인이었다. 그는 망설이는 고객에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스타일을 자세하게 그려주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재산이 많지 않은 고객들을 위한 새로운 견본 책자도 등장했다. 그 가운데도 가장 인기 있는 책은 존 라우던의 <오두막, 농장 별장 건축 백과사전>(1833)이었다. 이 책은 스스로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에게 세상 어느 곳의 집이라도 본 따서 지을 수 있는 설계도를 제시했다. 이에 따라 지역적 특색을 간직한 건축은 급속도로 사라졌다.(44~45p)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내심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했으면서, 왜 자신의 작품을 주고 기술적인 맥락에서 정당화했을까?
그들의 신중함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 기준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비판에서 면제된 스타일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고딕이나 티롤 건축의 추종자들이 모더니즘 주택의 외양에 목소리를 높여 이의를 제기할 경우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면, 반드시 고압적이고 오만하다는 비난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민주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학에서도 최종 심판관은 구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71p)

건물이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는가?




3. 말하는 건물


슬프고 빈정거리는

교활하고 천박한

온유하고 용서하는

자비롭고 부드러운

잔인하고 냉소적인

어리석고 매우 관능적인

누구를 친구로 삼고 싶은가?

얼굴의 의미:요한 카스파르 라바터, <인상학>(1783)


우리는 살아 있는 형태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연역해 내는 데 익숙하며, 이런 습관 때문에 경쟁하는 건축 스타일로부터 서로 다른 강렬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단 1밀리미터 차이로 둔감한 입과 자비로운 입이 갈라진다면 창문의 형태나 지붕 선의 차이로 느낌이 확 달라지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우리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의 얼굴을 미세하게 관찰하고 구별하는 것처럼, 함께 살아가는 사물의 의미를 구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93p)


건축이나 디자인 작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번영에 핵심적인 가치를 표현한다는 사실, 우리의 개인적 이상이 물질적 매체로 변용될 수 있다느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108p)


우리 집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걸까?




4. 집,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우리가 존중하는 분위기와 관념을 구현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주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건물이 일종의 심리적 틀처럼 우리를 지탱하여,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유지해 주기를 기대한다. 우리 내부에 필요한 것 - 그러나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이을 위험이 있는 것 - 을 표현해 주는 물질적 형태들을 주위에 배치한다. 벽지, 벤치, 그림, 거리가 우리의 진정한 자아의 실종을 막아주기를 기대한다. 어떤 장소의 전망이 우리의 전망과 부합되고 또 그것을 정당화해 준다면,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는 말로 부르곤 한다.
집을 사랑한다는 것은 또 우리의 정체성이 스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111p)


물론 세속적 건축은 이를 옹호해 줄 분명하게 규정된 이념도 없고, 인용할 성스러운 문서도 없고, 숭배할 신도 없다. 그러나 종교적 건축과 다를 바 없이 그 궤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연향력을 행사한다. 종교가 이따금씩 주변의 장식을 진지하게 생각하늦 것을 보면서 우리는 세속적인 장소의 장식에도 똑같은 의미를 보여하게 된다. 그런 장소 역시 우리의 더 나은 부분이 사는 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124p)


종교에 따른 건축,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충돌, 취향, 사회와 개인에게 역사, 변화하는 투쟁과 야망의 기록..

결국 행복과 아름다움 긍정적인 변화를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로 남긴다.




5. 건물의 미덕


일상적 영역에서건 학문적 영역에서건 우리는 미덕과 악덕을 확인하는 일에 끌린다. '뒷공론'은 윤리철학의 통속적인 변형일 뿐이다. 보통 우리의 불만과 감탄을 추상적 가설로 증류해내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의 선을 확인하고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논문을 썼던 철학자들의 자취를 자주 쫓아다닌다. 이런 철학자들이 사람의 미덕에 이름을 부였듯이 우리도 건물의 미덕에 이름을 부일 수 있다. 관용이나 겸손, 정직이나 온화의 등가물을 건축에서 세심하게 집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건축과 윤리를 비교하다 보면 건물의 아름다움에 단일한 요인은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도 도움을 얻는다. 어떤 사람의 우수함을 한 가지 특질로만 집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질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어울리는 순간에, 특정한 조합으로 나타나야 한다. 어울리지 않는 재료로 만들어진 적당한 비율의 건물은 용기는 있지만 인내나 통차이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결함이 도드라져 보인다.(184~185p)


건축의 질서는 지나치게 복잡해지는 감정들로부터 우리를 방어해 주기 때문에 또 매력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규칙성과 예측가능성을 보여주는 인공적 환경을 환영한다. 결국 우리는 놀라운 일이 계속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191~192p)


인간은 단순하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굳이 구경하러 가는 것이, 산꼭대기, 눈앞에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테라스,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레스토랑 등이다. 아주 기본적인 즐거움을 느낀다.

우리는 문학에서처럼 건축에서도 중요한 작품은 복잡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많은 매혹적인 건물들이 사실 놀랄 만큼 단순하다. 심지어 반복적인 면도 있다.


영혼이 논리와 조화를 이루면, 그 자식으로 아름다움이 태어날 것 같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 작품에서는 질서의 베일을 통해 혼돈이 아른거려야 한다.


이 독일 시인의 통찰을 완벽하게 존중하는 돌담이 있다. 이 벽에서는 모든 벽돌이 살아 잇는 듯 제멋대로이고 개별적이며, 독특한 개성과 잉기를 담고 있다. 어떤 벽돌은 비틀거리고 어두우며, 그다음 벽돌은 분홍색으로 순결하고 세 번째 벽돌은 고집스럽고 자그마하며, 그다음 벽돌은 호두빵 같은 색깔과 질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모든 서로 다른 성격들이 크림 같은 모르타르 속에서 나란히 자리를 잡고 끝에서 끝까지 똑같은 전체적 구도를 확인해 주며, 개성과 조화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199p)


질서, 균형, 우아, 일치, 자기 인식의 키워드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내고 있다.




6. 들의 미래


들은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전쟁 때는 독일의 폭격기가 목표물과 멀리 떨어진 이 들의 상공을 날기도 했다. 오랜 자동차 여행에 시달린 아이들이 차를 세우고 이 들 가장자리에서 멀미를 달래기도 했다. 저녁이면 ㅅ가람들이 드러누워 저 위의 빛이 별빛인지 위성 빛인지 묻곤 했다. 조류학자들이 오트밀 색깔의 양말을 신고 돌아다니다가 검은딱새를 발견하기도 했다. 노르웨이 남녀 두 쌍이 자전거를 타고 영국 제도를 여행하다 이곳에서 하룻밤 야영을 하며 텐트 안에서 <안네 크눗스도터>와 <멜룸 박카르 오그 베르그>를 부르기도 했다. 여우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쥐들이 탐험 여행을 했다 벌레들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271p)


그러나 들의 시간은 끝이 났다.


새 집을 짓는다는 것은 보통 신성모독과 간은 행위다. 원래 있던 시골보다 아름다움에서 떨어지는 동네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정식이 아무리 씁쓸하다 해도 우리는 보통 수동적인 태도로 체념하며 이것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그렇게 양보하는 것은 건물이 그 존재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권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덩치과 견고함, 그 유래의 신비함, 그것을 없애는 비용과 어려움, 이런 것들 때문에 건물들은 추한 절벽면이나 산처럼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확신에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272p)


돈도 핑계가 될 수 없다.


바스의 크레센트와 에든버러의 뉴타운 건설이 싸게 먹인 것은 아니지만, 빠듯한 예산 때문에 건물이 추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난을 핑계로 영감 부족을 감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당하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부유한 교외와 이탈리아의 옛 시에나의 상점주 주택들을 한번 찾아가 보면 금세 또 뼈저리게 그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르 꼬르뷔지에는 필요한 자금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현대에는 위대한 도시를 건설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 데 질렸는지 비꼬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우리한테 수단이 없나? 루이 14세는 곡괭이와 삽으로 다 했다...... 하우스만의 장비 역시 빈약했다. 삽, 곡괭이, 수레, 흙손, 외바퀴 손수레 이런 것들이 기계 시대 이전 모든 인류의 소박한 연장이었다." 우리가 가진 크레인, 채굴기, 빨리 마르는 콘크리트 용접기 등을 보면 탓할 것은 우리의 무능 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277-278p)


들 덕분에 우리 집은 워래 그 자리에 있던 처녀지보다 열등하지 않을 수 있다.

벌레와 나무들 덕분에 그것들을 덮어버린 건물은 가장 지혜로운, 최고의 행복을 약속할 수 있다.





도대체 건축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

꼭 글쓰기를 공부한 것과 같다.


과연, 나는 지금 이 공간에서 어떤 행복을 느끼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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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