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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4]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 결.

Adagio | 아다지오 | 침착하게 느리게

by 컬러코드

Adagio, 아다지오, 침착하게 느리게


병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결은 조심스럽게 한 발짝을 내디뎠다. 문틈으로 스며든 희미한 불빛, 정돈된 침대들, 낮게 깔린 대화 소리, 그리고 어딘가에서 조용히 울리는 기계음. 이곳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병실이었다.

아빠가 도착한 후, 결은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이 아니라 병원이었다. 엄마는 링거를 맞으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결은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Adagio – 조심스럽게 흐르는 시간

병실의 공기는 무겁고 조심스러웠다. 환자들도 보호자들도 조용했다. 사람들의 숨소리마저 부드럽게 이어지는 듯했다. 결은 천천히 병실을 둘러보았다.

구석 침대에는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곁에는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가 간이침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맞은편 침대에서는 젊은 남자가 눈을 감고 있었고, 그의 보호자는 책을 펼쳐 놓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결은 침대 옆 보호자용 의자에 앉았다. 딱딱했다. 등을 기대도 어깨가 불편했고, 다리를 오랫동안 올려놓기도 애매했다. 아빠는 침대 옆에 앉아 엄마의 손을 가만히 잡고 있었다.

결은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병실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렀다. 창밖의 어두운 하늘, 링거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 간호사가 들어와 조용히 상태를 확인하는 모습까지.


낯선 공간에서의 침묵

결은 숨을 죽였다. 작은 소리도 이곳에서는 커 보였다. 물을 마시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가방의 지퍼를 여는 소리. 이 병실에서 결은 처음으로 ‘조용해야 한다’는 감각을 배웠다.

아빠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니?”

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은 말할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쉽게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배려하고, 조심하고, 인내하고 있었다. 한밤중의 병실은 마치 느리게 연주되는 피아노 곡처럼 흐르고 있었다.


아빠의 시선 – 보호자로서의 무게

아빠는 결을 바라보았다.

작은 어깨가 움츠러들고, 두 손은 가방을 꼭 쥐고 있었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를 걱정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울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고, 병실의 분위기를 살피며 어른스럽게 행동하려 했을 것이다.

아빠는 딸의 작은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결아, 많이 힘들었지.”

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아빠는 그런 결의 모습이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보호자로서, 결 역시 병실에서 자기만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병실의 불빛에 비친 결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더 성숙해 보였다.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듯한 모습이 안쓰러웠다.

‘아직은 엄마 품에서 안겨 울어도 될 나이인데…’

하지만 결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병실의 분위기를 읽으며,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보호자의 역할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옆 침대 할머니의 시선 – 어린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있던 할머니는 살짝 고개를 돌려 결을 바라보았다. 작은 아이가 보호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움이 가득했고, 두 손은 가방 끈을 놓지 않았다.

‘어린것이… 저리도 애쓰는구나.’

할머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젊었을 때, 자신도 저런 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 병실에서 엄마 곁을 지키던 작은 손.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으며, 어린 나이에 감정을 억누르던 모습. 결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할머니는 손을 뻗어 담요를 살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애도, 곧 익숙해지겠지… 하지만 너무 빨리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병실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결의 손끝은 여전히 가방을 꼭 잡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그 손이 좀 더 편하게 놓일 날이 올 것이다.


응급실부터 지켜본 간호사의 시선 – 조용한 관찰자

병실을 정리하러 들어온 간호사는 결을 보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응급실에서부터 이 작은 보호자는 엄마를 꼭 붙잡고 있었다. 작지만 꿋꿋한 아이. 처음에는 울 것 같았지만, 그 눈빛에는 오히려 걱정이 더 컸다.

간호사는 차트를 확인하며 결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른들 틈에서 스스로 보호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듯한 모습. 아이는 아이답게 있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병실에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조용히 다가가 결의 손에 따뜻한 물병을 건넸다.

“차가운 물만 마셨을 거야. 따뜻한 것도 마셔야 해.”

결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병을 받아 들었다. 간호사는 결이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아이도 보호자야.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따뜻한 손길이 필요할 거야.’

병실의 공기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결은 천천히 이 공간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아빠는 다시 한번 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 아이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 않도록, 내가 지켜줘야 한다.’

병실의 한쪽에서는 할머니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한 아이는 여전히 가방을 꼭 쥐고 있었다.

병실의 밤은 그렇게, 느리지만 조용한 선율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결이의 꿈 – 내일을 향한 희망

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낯선 공간, 조심스러운 공기, 낮은 숨소리들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속에는 무언가 따뜻한 것이 퍼지는 듯했다.


꿈속에서 결은 병실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창밖에는 새들이 지저귀는 곳.

엄마는 건강한 모습으로 결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침대 옆 의자는 푹신했고, 보호자들이 서로를 배려하며 따뜻한 차를 나누었다.

병원의 창문이 활짝 열리며 상쾌한 공기가 들어왔다. 아이들이 뛰어다닐 수 있는 작은 정원, 다정한 간호사들의 미소, 그리고 바삐 움직이는 의사들의 발걸음에서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결은 꿈 속에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면 좋겠다...

엄마도, 다른 환자들도, 보호자들도, 모두가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병원이었으면 좋겠어."


멀리서 들리는 아빠의 낮은 숨소리에 결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이 오면, 엄마의 상태는 조금 더 나아질까? 아빠는 조금 더 웃을 수 있을까?


결은 꿈 속에서 손을 뻗어 희망을 잡으려 하듯 미소를 지었다.


병실의 밤은 그렇게, 느리지만 희망을 품은 선율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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