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쯤에는
올해 초 회사가 이사를 해서 새로운 동네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지하철을 타고 역에 내리면 회사까지는 버스로 네 정거장, 걸어서는 27분 정도가 걸렸다. 회사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마음에 꼭 드는 나만의 루트를 만들기까지는 한 달 정도가 걸렸다. 나는 나무가 있고 새가 노래하는, 물이 흐르는 곳을 걷는 시간을 꼭 필요로 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버스는 타지 않았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는 날만 빼고 걸었다.
건물을 끼고 있거나 흡연이 가능하거나 신호등이 있는 길은 제외했다. 풀과 나무와 고양이와 새 그리고 물고기로만 이어진 길을 걸을 수 있어 행복했다. 출근이 목적이 아니라 걷기 위해 출근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길에는 새싹이 돋았고, 꽃봉오리에서 핑크색 꽃잎이 가득 폈다 졌다. 비가 내리고 따듯한 바람이 불더니 눈이 부시게 싱그러운 녹색 잎들로 산책로가 풍성해졌다. 그리고 또다시 비가 내리고 빨갛고 노랗게, 주황색으로 단풍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첫눈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주 짧게 눈이 내렸다. 허구인지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또 한 번의 사계절이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도마뱀 커플과 2센티 개구리, 작고 큰 뱀, 나비와 너구리, 고양이, 주황색 작은 새, 잉어, 오리가족, 잠자리, 왜가리와 백로를 만날 수 있었다. 자연을 가까이에 두면 아무래도 덜 슬퍼졌다. 그들 사이에 있으면 조금은 덜 불안했다.
하루는 점심 산책을 하는데 음악 스트리밍 앱에서 랜덤으로 그 노래가 나왔다. 오랜만이었다. 그 노래를 들으면 스물넷의 내가 떠오른다. 나는 젊었고, 지금 보다는 훨씬 자유로웠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꿈을 반납하는 대가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때 나는 꿈을 잃어버린 나와는 달리 명확한 꿈이 있고, 그것을 이뤄내고 말겠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한 친구에게 완전히 푹 빠져 있었다. 도전과 용기와 꿈 그리고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실천하는 것. 내가 원했던 것. 그 친구와 꿈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희망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열정이 내게 번져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친구는 내가 알려준 그 노래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고, 그 노래는 한 때 우리의 배경음이 되었다. 하루 중 가장 많이 듣는 노래였다. 나는 자유를 손에 쥐는 순간마다 그 음악을 들었고, 반짝이는 꿈을 가진 그 친구를 사랑했다. 동시에 꿈을 찾는 것을 계속하려는 나 자신을 사랑했지만 고백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친구는 꿈을 끝내 이뤘는지, 아니면 포기했는지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진짜 그가 원했던 꿈이었을 거라고.
퇴근길 역 주변에서 하얗게 샌 머리의 노인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가벼운 목인사를 하며 지나쳤다. 여러 날을 그렇게,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얼마 후 그 노인은 전단지를 받아주는 사람과, 나 같은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는 듯 나에게는 더 이상 손을 내밀지 않았다. 문득 그 노인이 나눠주는 전단지가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져 받아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는 그 노인을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노인이 있던 자리에는 동그란 스티커가 붙여진 폼보드가 이젤에 올려져 있었고, 젊은 두 사람이 손을 흔들며 스티커를 하나만 붙여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나는 나라는 사람이 자유에 얼마나 목말라하는지, 자유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인지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울어야 할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다시 스물네 살의 나처럼 잃어버린 것을 계속해서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할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