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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서너 개 지나면

by 초록낮잠

끄적일 때, 제일 나다워지는 것 같다.

오늘은 원치 않게 버스를 많이 탔다 터널도 서너 개 지났다 우산도 잔디밭에 두고 와버리고 결혼한 친구도 만났다 커피도 두 잔이나 마셨고 동료한테 짜증을 비췄고 비싸고 맛없는 점심도 먹었고 2시간 넘는 거리의 외근 덕분에 지금 이렇게 야근도 하고 있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친구 딸이 나를 이모라고 불렀으며 그 애는 꼭 귀엽게 작은 악마 같았고 나는 그 애를 들여다보며 어쩜 친구 남편 얼굴 반 내 친구 얼굴 반이 오묘하게 섞여 있을까 하고 신기해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채팅창으로 친구들 중 A는

사랑이 뭐냐고 했다, 예전에 아주 오래오래 만났던 그가 그립다고 했다. 그를 매몰차게 떠나버린 건 A라서 이제 와서 다른 여자와 행복해 보이는 그에게 차마 다시는 연락할 수 없기에 마음을 꾹꾹 눌렀다고 했다. 나는 잘했다고 말했다. A는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도 잘해주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B는 잘해주는 사람이면 그게 좋은 거라고, 현실적인 조언을 했고 그런 식으로 곧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A는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B는 아무리 사랑해도 시간이 지나면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했지만 A는 감정이 깊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어떠한 것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A의 말도 B의 말도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다 틀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제 사랑 따위에는 흥미가 좀 떨어진 것 같다고 내뱉었다. 자꾸 현실이랑 겹칠 때면 속물처럼 보이는 내 모습이 싫기도 하고, 또 아무 조건 없이 빠지기엔 그건 너무 순간적일 뿐이고 급하게 빠진 것일수록 와르르 깨지기도 쉽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일까? 사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고 나는 그냥 내가 타고 가는 이 버스가 폭발해서 터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다.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문득 1시간이 1분 같고, 30초가 3시간 같고, 18분이 18일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시간을 잃어버리는 순간들

나는 가끔 시간을 잃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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