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멋있지 말아 주세요

1장 : 계절보고서

by 양율




오랜 친구와 긴 통화를 한 날 밤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20년 전 메일함에 접속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링 하던 시절, 학교에 남아있던 친구들과 나누던 메일들이었습니다.


그 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아직 디지털로 발음되는 메일이 수십 개 남아있었습니다. 나는 20년 동안 살기 위해 온몸에 피를 돌리며 살았습니다만, 그 메일들은 뜨거운 문장에도 피가 필요하지 않았나 봅니다.


메일 속의 우리는 당찬 기운으로 매일 정진하는 깨달음을 논했습니다. 니체 아래서 우당탕탕 소란스러웠고 어떤 친구는 데리다의 해체쇼와 레비나스의 휴머니즘에 두 손 들어 환호했으며, 또 다른 친구는 말라르메와 트라클을 발췌해 같이 읽었습니다. 나는 라디오헤드를 찬사 했고 입맛 따라 그들이 좋아했던 헨델과 너바나도 알게 되었죠. 그 사이에 침묵이 들라치면 내가 처음 작곡한 음악과 시들도 보내주며 억지 환영도 받아냈습니다. 그렇게 매일 세계의 아름다움에 감격하며 살았습니다.


그 메일 속에 우린 얼른 서울로 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당신들은 고등학교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고, 학교를 그만둔 내게 종종 최근 교실 내 스캔들 정보를 날아다 줬습니다. 난 유림이와 용준이가 이방원과 정몽주 마냥 파워포인트로 띄운 텍스트로 티격태격했단 얘기에 키득거렸고요.


스무 살이 되던 땐 서로의 캠퍼스로 찾아가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계단 밑에서, 공터에서 놀이터에서. 서로 군대에서도 이 악물고 편지를 썼죠.


당신들은 내가 출연한 흑백영화 같습니다. 가끔 먼지 묻은 바랜 것들에 갈증이 날 때 틀어보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는 내 멋대로의 작품이겠지만 충분히 이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추억을 검토하다가 공백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랜 시간 마주한 눈빛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작별은 무사한지, 사는 건 괴롭진 않는지, 우리의 말들은 당신 속에 아직 살아있는지 망연합니다.


인연이 쉽게 끊어질 수 있음에 묵념합니다. 차갑지만 이 시대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음을 이사하다 깨닫게 됩니다. 아 그래, 너. 맞지. 그래. 너.


용기를 내 봅니다. 그렇게 전화번호를 찾아 5년 만에 하는 통화였습니다.


학생 시절 떠들썩한 기운으로 호흡하던 허파는 죽고, 세상의 견고한 질서 속에 내처 사는 피로한 목소리가 들어서 있습니다. 검찰청 소속으로 마약 사범 검거하는 험한 업무에 애환이 들어선 김에 우린 오랜 옛날얘기를 나눴습니다.


우리의 순박한 기억들과 지금의 살아감이 호환되지 않아 어색합니다.


스무 살 첫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때. 처음 담배를 폈던 그날. 밤에 맥주를 들고 찾아갔던 호수. 새벽을 지새운 첫사랑의 고민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정서에 느닷없는 동력을 돌립니다.


그 간의 시간은 환상 같아 현재의 재테크니, 부동산이니, 직장이니 하는 실용적 세계의 여집합에 부조리한 내 일부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친구입니다. 허나 우리는 같이 살았던 그 세계가 엄연히 있음을 서로 확인했습니다. 그리 우린 다시 죽어있던 기억의 껍질을 살려 피를 돌립니다. 흑백의 기억은 잠시 온기를 되찾을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세상에 감명하며 살아왔음을 비로소 증빙할 것입니다.


소년에게 가혹한 서술은 원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그 기억 속 우리의 소년들은 멋있지 말아 주세요. 똑똑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멍청히 웃었던 당신을 알았던 것이 행운입니다.




keyword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