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계절보고서
난 소음이다.
태어난 날, 그러니까 수십 년 전에. 피와 양수에 뒤덮여 탯줄로부터 영원히 격조할 때부터 난 공기에 울음을, 소음을 뱉어내며 춤추듯 몸을 흔들었다. 엄마 나 어떡해. 뱃가죽 속 어둠이 편리하던 차에 낯선 세계로 호출된 나. 어리둥절해서, 이 세계가 너무 밝아서, 어떻게 당신의 세계를 대해야 할지 몰라 그래서 울었다.
병원 불을 흔들며 잘도 한 밤을 울어 제꼈다.
모든 탄생엔 소음이 동반되는 법이다.
제대로 된 단어 하나 못 뱉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오마" 라던지 "마마" 라던지 옹알이를 지껄이며 부모를 밤낮으로 괴롭혔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옹알이는 요령부득한 언어의 표절이다. 날 사랑해 내는 부모와 닮아지기로 한 허둥지둥 이자, 미지의 세상을 부둥켜안으려는 치열한 손사래였다.
소음은 끈질기게 내 인생을 따라다녔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과의 덧없는 수다와 싸움에 뒤따라왔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난 음악을 한답시고, 온통 내 인생을 망치질하며 공사판을 만들었다. 어머니 당신에게 이마를 구기며 좌우로 반항했다. 아버지의 주먹. 그 유리가 깨진 밤들은 소란들, 뒹굼들, 고성방가. 불협화음이었다.
대학생이 되어도 내 주변엔 소음이 가득했다. 기구한 멸망들이었다. 처절한 연애 했고, 부모와 애증 했으며 취업해 먹고살아나가는 일에도 파렴치하게 소동했다. 그놈의 고난들. 위로받고 싶어 망할 소리를 치켜세웠다. 왜 난 이 꼬.라.지.냐고.
나이가 꽤 들고 나서 리게티의 음악을 다시 청취한 적이 있다. 유레카였다.
리게티는 수 많은 악기가 각자의 박자와 선율로 소리의 얼개를 엮어 나가는 미세다공성(Micropolyphony) 기법으로 알려진 현대음악 작곡가다. 내 감각은 그의 오페라 <그랑 마카브르> 공연실황을 보다 머리에 큰 전율이 터져 오르는 걸 느꼈고 서서히 그 어떤 음악에서도 알지 못한 쾌감을 느꼈다. 소음인 줄 알았던 소리들이 합작하고 유합해 긴 시간의 한 축을 세워 설계하오니 이는 대단한 우주의 맥박이었다. 인류가 세계의 자궁에 힘껏 유영하는 뜨거운 심장박동 소리였다.
어릴 땐 그렇게도 듣기 싫었던 리게티였는데.
한 해, 두서 해 늙어가더라도 삶이 과연 쉬워지는가. 난 아직도 소란스럽다. 돌부리를 헛디뎌 허정허정 몰락한다. 얼마 전엔, 사람에 배신당하고 밥 벌어먹는 곳에서도 장난감처럼 무용이 쓰였다. 허, 참. 그럼 내 특기를 보여주지. 데구르르 무너지며 소동, 울음소리. 가여운 음악들을 쏟아냈다. 눈물로 짭조름한 메가헤르쯔의 무전기다.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통신한다. 나 아프네. 어떡하지?
그 모양은 태어날 때 어머니 무릎 밑에서 울부짖던 나와 꼭 같다.
난 어른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 어른 지위를 누린 지 한 참이 되어도 난 아기처럼 운다. 사랑해 주라. 달래주라. 위로 좀 해주라. 날 무한히 지켜줄 원초적 힘을 헛되이 기대하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모든 탄생엔 울음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흥행이든, 범죄이든, 이별이든, 사랑이든무대 옆에 크고 작은 소리들이 반주된다. 삶은 녹록하지 않고 각자의 소음으로 세상이 소란스럽다. 뉴스를 보면 매일 놀라게 된다. 하루하루가 사람들 사태로 경이롭다. 연예인들. 정치인들. 범죄자들.
확실히 세상은 지독히도 시끄러운 소음이다.
같은 신음을 내뱉었을까. 도망자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에서부터 작금의 스캔들 휘말린 대통령들, 예술가들, 셀러브리티들은. 결코 멀리서 볼 것도 아닐 것이다. 내 사랑스런 친구들은. 그들도 엄마를 찾듯 소리 낼까.
험준한 고뇌에 못 이겨 침묵을 선택한 반대의 사례도 있다. <핀란디아>로 유명한 작곡가 시벨리우스는 죽기 전까지 약 30년 간 아무런 곡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핀란드 시민의 기대를 받던 교향곡 8번을 작곡 중이라고 여러 번 서한에 밝힌 바 있지만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1940년대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원고 더미를 빨래 바구니에 담아와 장작불에 쑤셔 넣었다. 그 이후 그는 영영 절필하였다. 그의 아내는 그 사건 후 남편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이상하리만치 밝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변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침묵의 교향곡을 쓰고 만 것이다.
정확한 사정은 시벨리우스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나 그 전보다 더 아름다운 서사를 써 내려가야만 하는 한계와 내면의 전쟁을 직면하고 결국 침묵으로 귀향한 이들의 심정도 짐작할 만하다.
문정희 시인은 <끝까지 가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폐허가 있다>는 아름다운 문장을 썼다. 울음소리, 혁명의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에게만 결국 누구도 찾지 않는 숲 속 고요한 폐허가 마련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픈 소리 내다 침묵하며 그 깨달음의 속살로 정신을 준동해 내는지 모른다. 사람은 후회하고 신음하며 옛날 껍질을 탈피해 새사람으로 변태 한다. 터벅터벅 음소거의 세계관 속으로 걸어가 보는 것이다.
어쩌면 리게티의 음악처럼 이 소음들은 모두 우주의 박동 소리는 아닌가 한다. 소음에 지쳐 단촐한 창법을 가지게 된 사람들, 다시 탄생의 울음을 지껄이는 사람들 모두가 덕지덕지 엉킨.
난 세계 속 시끄러움이 꽤 멋진 공연이라 생각한다. 이 새벽 티켓팅에 도전할 수 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