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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다루는 법 단상

신촌. CGV. 언데드 다루는 법.

by Gozetto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을 대하는 산 자의 방법에 대하여(3.5)


죽음에 무력하기에 죽음을 다양한 방법으로 대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영화이다. <언데드 다루는 법>은 좀비 영화이지만 기존의 좀비 영화와 궤가 다른 영화이다. 영화는 좀비라는 장르적 특성을 기존의 문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다. 기존의 좀비 장르에서 좀비는 되살아난 '시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괴물의 일종이다. 죽어야 하는 존재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단순히 가족, 친지, 친구, 연인 등이 돌아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첫 좀비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 정립되기 시작한 좀비영화에서 좀비는 되살아나 살아있는 생명을 먹어치우는 괴물이기에 장르적으로 감정적 반응의 대상 이전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라는 이성적 해결의 대상으로 전제되어 있다. 죽어 있는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이 억압된(Undead)' 존재이기에 해결 방법은 어떻게 죽음으로 돌려놓는가 혹은 어떻게 좀비들로부터 살아남는가로 크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데드 다루는 법>은 기존의 좀비 영화와 다르게 '되살아난' 시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언데드 다루는 법>은 좀비를 이성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영화에서는 3개의 인물군이 등장한다. 각 인물군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좀비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 죽음에 얼마나 무력한지, 그렇기에 죽음을 대하는 가장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연인 '엘리자베트(올가 다마니 분)'을 잃은 '토라(벤테 뵈르숨 분)'는 돌아온 엘리자베트를 연인처럼 대하다 끝내 살이 먹히며 죽음에 이른다. 아내이자 엄마 '에바(바하르 파르스 분)'를 잃은 '데이빗(안데스 다니엘슨 리)'의 가족은 움직이는 에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들이자 손자 '엘리아스(데니스 외스트비 루드 분)'를 무덤에서 꺼낸 '말러(비욘 선드퀴스트 분)'와 돌아온 엘리아스가 다시 살아나길 기대하는 엄마 '안나(레나테 레인스베)'는 아무도 찾지 못할 외딴 섬으로 가나 그곳에서 되살아난 시체를 맞닥뜨린 말러는 죽음을 맞게 된다. 3개 인물군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닥쳐온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특히 삶도 죽음도 아닌 걸친 상태로 되돌아온 이에게 산 자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시시각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과 공포를 밀어내고 그곳에 부여잡은 희망을 밀어넣고 참아내는 것밖에 없다,


그렇기에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가장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방식은 애도하며 견디는 것 뿐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현실에서 발생한 사건이자 그러한 현실이 자신의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3개 인물군에서 알 수 있듯 너무나 비현실적인 일이다. 죽음에 의해 존재가 소멸되었을지라도 시공간에 축적된 감정과 경험 즉, 관계에 대한 육체적 공감각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에서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가 산 자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죽음의 비현실성은 살아있음에도 죽음과 삶 사이를 떠돌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이미 강을 건너 가운데를 떠다니는 이들인 것이다. 하지만 떠다닐 뿐 강을 건넌 이들이 아니기에 산 자는 공포와 희망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견디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거부하다 끝내 강을 건널 것인지를 말이다. <언데드 다루는 법>의 인물들은 바로 이 공포와 희망의 스펙트럼에서 다양한 애도의 방식을 선택을 하고 있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 중 결국 산 자로서 죽음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식은 안나의 선택이지 않냐는 개인적인 의견도 덧붙인다. 아들 엘리아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강에 놓아주며 가라앉는 엘리아스에게 작별을 고하는 안나의 모습은 죽음에 저항하는 산 자의 방식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남아있는 육체적 공감각을 되새기며 풀어헤치는, 길고 긴 애도의 여정을 떠나는 구도자와 같다. 토라와 같이 죽은 연인을 살아있을 때와 같이 동일하게 대하다 연인에게 죽는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으며 데이빗 가족처럼 엄마이자 아내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살 것이라면, 죽은 이에 대한 육체적 공감각을 지고 살아갈 것이라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공감각의 무게를 버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공감각의 무게를 지고 가며 삶의 영역에서 죽음을 넘어다 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언제고 어디선가 다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삶을 충실히 살기로 다짐해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쉽게 무감각해져 쉽게 손과 입에 올리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언데드 다루는 법>은 적어도 죽음에 저항하는 산 자의 방식이자 그들을 보는 우리의 예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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