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 둘 사이에 단상

잠실. 롯데시네마. 우리 둘 사이에.

by Gozetto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문제라는 것을(4.0)


장애, 이동권, 여성, 임신, 아동 등에 대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후천적 장애 여성의 임신을 통해 직시하게 하는 영화이다. <우리 둘 사이에>의 후천적 하지마비 장애인 '은진(김시은 분)'은 하지마비 장애인이자 결혼한 신혼 부부로 장애, 여성, 중산층, 신혼 등 다양한 사회적 소수성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은진이라는 인물은 개인이지만 동시에 한국 사회의 다양한 소수성의 현실이 체현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과 인프라를 이동권을 제한하는 사회적 인프라, 그나마 있는 이동권의 수단을 편의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폭력, 임신에 대해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생각해보라는 인식과 폭력 등 순간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낸다. 사회적으로 장애 자체를 있을 수 있고 현존하고 있으며 당연한 삶의 모습 중 하나로 보지 않는 한국 사회의 한계가 은진의 신체와 경험을 통해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관객에게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체현으로 인해 태아의 상태에 대해 염려하고 이따금 산부인과 의사에게 방어적인 공격성을 보이는 은진의 태도는 일반적인 산모의 염려나 걱정으로 느껴질 수 없다. 후천적인 장애임에도 자신에 의해 아이가 장애를 가질 수 있다는 중압감, 그렇다고 했을 때 장애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현실이 무의식적으로 가하는 중압감 등 관객도 은진이 느끼는 중압감을 간접적으로 체화하고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동시에 은진은 이른바 정상이라는 범주의 스펙트럼 내 삶을 살다가 어떤 사건에 의해 순식간에 비정상이라는 범주의 스펙트럼 내 삶을 마주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삶을 사는 인물로서 경계성의 인물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은진은 소수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제한적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이는 상징적 인물이다. 하지만 단순히 은진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호선(설정환 분)', '지후(오지후 분)'와 관계를 통해 사회적 연대 형성으로 제한적 현실의 극복을 제안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 둘 사이에>는 한국 사회의 현실, 그러니까 가려져 있는 이면의 혹은 중첩되어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누군가 보기에는 편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다양한 소수성의 교차가 무시되는 극단적인 양극화의 현실에서 이러한 인식적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자 효과적인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중압감 중 은진은 한국 사회의 물리적 인프라가 어떤지 모르고 있지 않으며 그에 대해서 아쉬워 하지만 동시에 이에 대해서 방어적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은진은 개개인의 언어와 인식에 대해서 방어적 공격성을 보인다. 애초부터 영화는 장애, 여성, 임신 등에 대해서 사회의 물리적 인프라가 지닌 한계를 개개인의 실질적인 행위가 선행되어야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우리 둘 사이에>는 극장 밖 양극화의 현실을 대상으로 실질적인 행위 변화를 촉구하는,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문제임을 드러내는 영화인 것이다.


여담으로 <우리 둘 사이에>를 보다 묘한 윤리성을 떠올리게 됐다. 영화에서 은진은 개개인의 인식과 행위의 집합일 사회적 중압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환시, 환청을 겪게 된다. 환시, 환청이라는 서사적 요소가 굉장히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미 서사 속 현실에 의해서 지나칠 정도의 중압감을 견디고 있는 인물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알 수 없는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 은진은 임신이라는 사건을 겪으며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홀로 견디고 있는 본인의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무의식과 대화하며 스스로 위로 받고 이별하는 것으로 환시, 환청을 극복하게 해 개인적으로 느낀 고통을 해소해줬다. 그럼에도 물론 충분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기준에 의한 것이기에 객관성을 담보하지도 않고 논의의 여지가 있는지도 알 수 없으나, 서사적으로 이미 충분한 고통을 받고 있는 인물에게 너무 과한 고통을 더욱 가하는 것이 윤리성에 맞는지를 모르겠다. 지후의 환시, 환청에게서 은진이 위로 받고 이별하는 장면이 없었다면 지나치게 과한 서사적 설정과 연출로 인물을 수단화 했다고 느꼈을 듯하다. 그만큼 영화에 깊이 몰입했기에 영화 외적으로 묘한 윤리성을 인식하고 느낀 개인적인 고통이니 그냥 넘겨도 되려나? 영화를 관람하면서 느낀 묘한 경험이기에 남겨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