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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단상

부천시청. 판타스틱큐브. 용의자 X의 헌신. BIFAN 3일차.

by Gozetto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멋과 기교로 가리는 원작의 맛(3.0)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에 대한 인상은 크게 두 가지이다. 꾸준함과 대중성. 한 때는, 그러니까 강산이 변하기 전 대학생 새내기 즈음에는 거의 매년, 어떤 경우에는 반 년에 한 번씩 작가의 책 한 권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소개될 정도로 서점에서 신작이 소개되었다.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크게 유럽-북미파, 일본파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가 무색하게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소설의 독자들 중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책을 단언컨대 단 한 권도 읽어보지 않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누가 보면 공장처럼 나오는 것 같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책은 물리적 접근성만이 아니라 독서적 접근성까지도 쉽다 보니 입문용이든, 시도용이든, 한 눈 팔기용이든 여러가지 인연으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꾸준함과 대중성은 부정적으로 보면 양산형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책은 언제나 중간 혹은 평타는 친다는 느낌을 준다고도 할 수 있다. 읽고 나서 범인의 동기나 범행 방식 등 서사가 매끄럽지 못해 아쉬움을 주는 경우가 이제까지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대단히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즉,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는 항상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서 오락적 쾌감은 충분히 주는 작품을 항상 쓰지만 너무나 만족스러운 쾌감에 의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기 위해 음미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작품으로 만나기는 어려운 작가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런 와중에 『용의자 X의 헌신』(2006)은 굉장히 인상 깊은 소설로 기억에 남아 있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물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읽었는데 당시 책을 덮으니 서늘한 가운데서도 따뜻한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고등학생 정도에 읽었으니 출판되고 난 후 꽤 시간이 지난 다음 읽은 것인데 그 뒤로도 꽤나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사실 소설에 대한 인상만 남은 상태라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뒤 한국에서 원작을 영화화한 <용의자X>(2012)를 우연한 기회로 TV에서 볼 수 있었고 성인이 된 뒤에는 군대에서의 인연으로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을 관람하면서 소설에 대한 인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리메이크와 각색이 된 소설을 보다 보면 인상이 깊을 때도, 아쉬움이 남을 때도 있으나 본 텍스트 모두 소설을 읽었을 때의 인상, 서늘하고 날카롭게만 느껴지는 세계에서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감정의 따쓰한 꿈틀거림이라는 결은 동일했다. 이렇게 텍스트를 인식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29회 BIFAN을 즐긴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본 <용의자 X의 헌신>(2008)은 묘하게 아쉽다는 감상이 남는다. 애초에 원작이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물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시리즈물을 모두 보지 않은 상황에서 남은 원작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용의자 X의 헌신>은 원작에서 느낀 인상 위로 멋과 기교가 덮여 있는 느낌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용의자 X의 헌신>은 시리즈물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인지 몰라도 시리즈의 주인공인 '유카와 마나부(후쿠야마 마사하루 분)'를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느 기업 CEO가 탄 요트의 폭발 및 화재 사건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트릭에 의한 살인 사건임을 밝히는 장면은 거대한 실험 장치, 폭발음 등과 함께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에는 논리와 이성에 의한 분석만 있으면 된다는 자신만만한 유카와 교수와 겹쳐진다. 다르게 말하면 이 영화의 시작은 유카와 교수의 추락의 준비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염두하지 않고 세상을 논리와 이성으로만 이해하려는 오만한 유카와가 라이벌 의식과 흠모를 모두 느낀 대학 동창이자 오직 사랑 때문에 살인까지 하는 '이시가미 테츠야(츠츠미 신이치 분)'를 만나면서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마도 시리즈물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며 시리즈물 중에서도 원작만을 본 본인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변명을 하자면 추리와 영화라는 장르가 결합하면서 발생한 듯하다.

추리 장르에서 탐정은 주인공이면서도 주인공이 아닌 인물이다. 겉으로 보기에 탐정은 텍스트 전체의 주인공 같으나 좀 더 자세히 보면 이들은 사건의 외부인으로 관찰자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의 공포를 분석해 해결해준다는 점에서 탐정은 서사 전체를 조율하는 신적 위치에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즉, 탐정은 서사 전체를 조망하고 동시에 서사의 끝을 맺게 하는 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주인공보다 더 전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다르게 말하면 독자에게 탐정은 주인공이 아님에도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혹은 주인공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매력과 마력을 지닌 인물이다. 이를 영상화하는 과정에서 탐정은 더욱 확정적인 매력과 마력을 지니게 된다. 실사화는 단순히 글로 혹은 그림으로 보던 인물의 실체화로만 요약할 수 없다. 실제 물리적 감각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체현으로 서사의 인물과 현실의 관객 사이가 더욱 좁아진 상태로 봐야 한다. 추리 장르에서 탐정이 갖는 위상을 생각해보면 원작의 실사화는 탐정의 위상을 더욱 공고화한다. 이로 인해 화려한 시작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은 유카와는 탐정으로서 더욱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애초에 외모에서 굉장히 매력적이고 잘생겼다는 평가를 받는 배우가 연기를 하고, 그리고 실제로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배우인 만큼 유카와라는 인물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진다.

탐정과 범인 관계로 대결 구도를 갖는 유카와와 이시가미의 구도는 실사화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이 명확한 구도 역시 원작에 대한 인상을 헤치는 기분이 든다. 원작에서 느낀 서늘함은 이성적인 행동 이면에 있는 꿈틀거리는 감성에서 비롯된다. 논리와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유카와가 이성의 화신처럼 보이지만 주도면밀하게 움직이며 모든 것을 준비한 이시가미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으로 느껴진다. 그러한 과도한 이성적 모습은 서늘하지만 동시에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해 따뜻하게 느껴지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시가미의 행적을 글로 읽어야 하는 원작은 유카와가 아니라 이시가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는 명백하게 둘의 대결 구도를 강조하는 가운데 실사화에 따라 유카와가 갖게 되는 공고한 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듯하다. 다르게 말하면 과학에 기반한 자신의 신념을 파고드는 날카롭지만 따뜻한 감성에 고뇌하며 추락하는 유카와의 모습을 적극 활용하는 듯하다.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살인까지 불사하고 나아가 자신의 파멸까지 불사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서늘함과 따뜻함의 모순이 원작에서 보다 가려지는 느낌이다.

P.S.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아무래도 시리즈를 처음부터 읽어봐야 할 듯하다. 기회가 된다면 실사화된 드라마 시리즈 역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도라마코리아에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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