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CGV. 수연의 선율.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뚝뚝 끊기는 선율에도 이어지는 물방울의 인연(3.5)
참 공교롭게도 영화를 보기 전 알베르 카뮈의 단편 소설집인 「변신·시골의사」 중 변신을 읽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수연의 선율>을 보는 순간 '버려짐'이라는 소재로 두 텍스트가 겹치면서 가슴이 거북하게 들뜨고 울렁거렸다.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삶도 없이 노동만을 하며 살아왔으나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로 변했다는 이유로 끝내 가족들에게 버려졌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그레고르를 가족에서 가장 먼저 내치자고 한 것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원하던 음악 학교로 진학시켜주겠다고 선언하려 한 대상 여동생 그레타라는 점이다. 심지어 그가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아 굶어죽다시피한 상황에서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가족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며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망치는 존재의 죽음으로 보며 다행스럽게 여기고 나아가 그레고르의 부모는 그레타의 몸을 보며 잘난 남자에게 시집 보내 팔자가 필 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그레고르의 비극만큼이나 가족을 찾는 두 아이 '수연(김보민 분)'과 '선율(최이랑 분)'이의 비극도 너무나도 울렁거린다. 특히 마치 두 아이 특히 수연이가 자신들이 겪었던 일을 나중에 회상하는 것 같은 영화의 전개와 끝내는 현실적일 수밖에 없던 선택을 하는 듯한 두 아이의 결말은 영화관을 떠나기 어렵게 한다.
<수연의 선율>에서 눈여겨 보면 좋을 것은 영화의 장면 전개가 매끄러운 초중반부와 뚝뚝 끊기는 듯한 후반부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장면 전개만이 아니라 선율을 입양한 부부의 과거처럼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도 장면 전개의 변화와도 맥이 닿아 있다. 앞서 영화가 마치 두 아이, 특히 수연이의 기억을 보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 바 있다. 초중반부는 할아버지가 실종된 가운데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보호자를 찾거나 보호소로 들어가야 하는 수연이 선율이를 입양한 가운데 다른 입양아도 계획 중이라는 '유리(김현정 분)'와 '태호(진대연 분)' 부부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결국 가족이 되는 내용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보호자가 없는 가운데 수연을 책임져야 하는 담당 공무원은 최대한 수연의 선택을 존중하는 듯하지만 그만으로는 수연을 보호할 수 없고 공무원 역시 자신의 업무 외적으로 수연을 책임지지는 않는 듯하다. 수연을 좋아한다는 남학생은 수연이 혼자 있는 상황을 이용하고 음습하게 수연에게 접근하며 수연의 친구였던 가영이의 부모는 재개발이 예정된 수연의 집을 자신들이 처리해준다고만 할 뿐 수연이를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이용하려고까지 하는 현실을 수연은 명확히 이해하고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찾기에 초중반부는 수연의 주체적 행동만큼이나 아이의 기억을 가감없이 동시에 유려하게 보인다. 다르게 말하면 초중반부의 경험, 그러니까 버려지기 전의 경험은 수연과 선율이 둘 다에게 기억하고 싶은 행복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사업의 실패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유리와 태호가 수연이와 선율이를 버리고 간 이후 진행되는 중후반부부터 영화의 장면 전개는 서서히 뚝뚝 끊기는 것처럼 전개된다. 아파트에서 자신들을 버리고 간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문을 두들기는 어른들의 목소리를 견디는 아이들의 시간은 대체 얼마나 흘렀을까? 그런 아이들이 수연의 할머니 집으로 돌아와서는 얼마나 있었을까? 비를 맞아 열로 쓰러진 수연이는 자신의 실종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보고 나간 것 같은 선율이를 어떻게 찾았을까? 시간의 흐름도 그 시간 속 사건도 모호한 중후반부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기억이 나더라도 고개를 저으며 잊고 싶은 경험들로 가득하다. 동시에 자신들이 경험한 일이지만 초등학교 6학년과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에게 어른들의 속사정 혹은 국가의 시스템 등은 이해할 수 없기에 당연스럽게도 수연이의 기억에서 이러한 속사정과 시스템은 직관적이고 직설적인 폭력으로 그려진다. 스크린 너머에서 아이들의 기억을 엿보는 관객은 아이들이 겪는 무자비한 현실의 폭력을 이해하고 솟구치는 욕을 삭이면서 아이들의 무사를 숨 졸이며 바랄 뿐이다. 즉, 후반부에서 뚝뚝 끊기는 듯한 장면 전개는 버려진 이후의 수연의 기억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마지막 장면은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더욱 안타까우면서도 함께 하는 미래를 그리게 해 희망이 느껴지기도 한다. 버려진 것에 대해 받아들이는 두 아이의 태도를 보면 굉장히 상반된다. 선율이는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수연이는 할머니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가족을 잃어 버려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선율이까지 챙기는 과정에서 무리를 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태도를 기억한다면 선율이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보인 똘똘한 모습들이 오히려 지나치게 어른스러워 자신이 수연에게 짐이 된다고, 지금 함께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다고 느껴 실종 뉴스를 보고 나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즉, 자신들이 지금 같이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더 먼저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수연이는 버려지는 것이 무엇보다 싫기에 어떻게든 가족을 만들려고 한 것이며 그렇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선율이를 지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기에 본 적도 없는 혈육인 실종된 할아버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함께 살기로 마음 먹고 선율이와 이별한 것은 아닐까 한다. 이러한 둘의 상황을 인지하고 나면 마지막에 선율이가 있는 보육원에서 서로를 보고도 서로의 이름은 부르지 않은 채 바라만 보는 두 아이의 모습은 어린 나이에도 서로를 책임질 수 없다는 현실을 인지하고 이를 받아들인, 어린아이 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굉장히 현실적이기에 안타깝다. 하지만 동시에 물방울 안에 두 사람을 그린 선율이의 그림이나 그런 선율이를 잊지 않고 찾은 수연이의 모습은 다른 의미에서 결국 두 아이가 서로를 책임질 수 있는 현실이 되면 다시 가족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도 해 희망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