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씨네큐브. 퀴어.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넘어 영원한 연결을 꿈꾸며(3.5)
리뷰나 비평에 준하는 글은 당연하고 단상 조차도 쓰는 것이 주저되는 감독들이 있다. 좋든 나쁘든 충격을 받으며 인상이 남으나 정리가 안 되는 영화. 보통 일반 관객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 마니아든 평론가든 어떤 식으로든 논란이 발생하는 영화들에게서 저런 반응이 나오는데 매번 비슷한 감독들의 영화가 그렇다. 예를 들면 최근 봤던 <페니키안 스킴>의 웨스 앤더슨 감독. 그리고 지금 단상을 쓰고 있는 <퀴어>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정리되지 않은 인상은 글로 쓰기에도 애매하지만 글로 쓰면 겉핥기식 조야함이 부끄러워 쓸 생각을 못하는 감독들이지만 그나마 <퀴어>에 대해서는 쓸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쓰다가 정말이지 더 논리를 진전시키기 어렵다면 금방 포기하겠지만 말이다.
<아이 엠 러브>(2009),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3), <본즈 앤 올>(2022), <챌린저스>(2024)를 관람하면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하면 개인적으로 '사랑'이라는 소재가 떠오른다. 단순히 사랑이라기 보다는 성애에 가까우며 특히 정상애라고 여겨지는 이성애가 아니라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지는 퀴어적 성애에 기반한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사랑은 절대 플라토닉하지 않다. 언제나 실존하는 육체를 기반으로 성애적 사랑이 실재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제시된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사랑을 감정과 행위 둘 중 하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둘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함께 작동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퀴어적 성애는 이성애라는 인식적, 사회적 정상애가 작동하는 현실에서 굉장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이성애는 기본적으로 성을 남과 여로 규정한 육체적 성에 국한시키고 이에 기반해 작동하면서 성애의 경우에는 이성, 문명, 생식 등 이성적 요소들을 덧붙여 일종의 도덕적 기준으로 사랑을 과정화하고 제도화한다. 하지만 퀴어적 성애는 동성, 양성, 무성 등 어떤 경우에든 존재에 대한 원초성에 기반해 작동하기에 육체적 성의 구분만이 아니라 그에 기반한 감정과 행위의 정동을 모두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감정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방식을 분리하고 과정화 해 하나로 규정하는 이성애에서는 퀴어(Queer)의 표면적 의미에서 유추 혹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인식에서 알 수 있듯 퀴어적 성애를 감정이든 행위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퀴어적 성애는 성립할 수 없다도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전술한 전제에 기반하면 <퀴어>에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동성을 사랑하는 남성 작가 '윌리엄 리(다니엘 크레이그 분)'를 통해 당연한 사랑을 함에도 퀴어적 성애로 규정되어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정신적 분열을 드러내고 이를 불합리하다 여기며 그들을 위로하려는 듯하다. 리는 겉으로 보기에 육체 관계에 집착하는 것 같으나 애초에 사랑은 감정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보는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리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특히 그가 자신과 관계를 맺은 젊은 남성에게 관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 '유진 앨러튼(드류 스타키 분)'과 함께 있는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시간과 자본을 모두 책임진다는 점, 유진이 싫다고 강하고 분명하게 말하면 서운해 하지만 육체적 접촉을 포기한다는 점 등은 리의 모습은 단순히 육체 관계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위는 감정 그 자체이며 섹스는 사랑 그 자체이다. 하지만 리의 모습은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보기에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등 어떤 경우에든 비도덕적이며 폭력적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리가 꾸는 꿈을 돌이켜보면 그는 자신이 사회에서 고립되었다는 수준을 넘어 존재에서부터 배제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꿈을 꾸기 전 동성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리의 친구의 애인으로 함께 바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성이 자신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어 엄마에게 성애를 느낀다는 정신 분석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꿈에서 리는 계단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아기 때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마도 리의 어머니일, 토르소처럼 팔다리가 잘려 있는 여인은 팔과 다리가 없기에 리에게 다가가지도 안아주지도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반대로 다가가거나 안아줄 생각 자체를 안 한다고 봐야 한다. 리는 태어날 때부터 원초적으로 남성을 사랑하는데 바로 그 원초성에 의해서 가족에게 배제된 것이다. 이러한 리의 상태를 보건대 그가 섹스에 집착하는 이유 나아가 텔레파시를 가능하게 하는 약초에 집착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배제된 존재인 리는 자신과 연결된 이를 희구하는 가련한 인간이다.
섹스는 단순한 육체적 합일이 아니라 정신적 교감이기도 하다. 즉, 감정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사랑의 관점에서 섹스는 육체와 정신의 합일, 즉 텔레파시이다. 하지만 섹스는 결국 두 인간이 같은 시공간에 서로 동의를 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텔레파시가 가능하다면 감정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사랑의 관계에서는 멀리에 있어도 서로 합일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관점은 리와 유진이 약초에 취했을 때 자신은 퀴어가 아니라고 말하는 유진의 육체와 알고 있었다고 답하는 리의 육체가 섞인다가 아니라 융합되는 듯한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융합 이후 에필로그는 굉장히 난해해 보인다. 남미 여행에서 홀로 멕시코로 돌아온 리는 갑자기 공중에서 해변으로 등장하고 친구 '조(제이슨 슈와츠먼 분)'이 유진이 여행을 갔는데 들었느냐고 묻는데 리는 들었는지 아닌지 모호한 표정을 짓다 그렇다고 말한다. 마지막에는 늙은 리가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의 집에서 홀로 누워 있는데 그의 뒤로 벌거벗은 유진이 그를 안고 리는 유진의 포옹을 느끼며 웃으며 서서히 죽는 듯하며 끝난다.
이 난해한 에필로그를 앞서 언급한 텔레파시와 연결해보자. 텔레파시로 유진을 느낄 수 있는 리는 어디에서건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와 연결되는 것을 느끼고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지는 못한다. 퀴어가 아닌 유진에게 텔레파시로 리가 느끼는 감정과 삶이 감당하기 어려웠을 수도 혹은 애초에 텔레파시 자체가 리와 관계를 유지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경험이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리는 오직 유진만이 자신과 연결된 유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기꺼워하며 홀로 그와의 텔레파시를 느끼고 살다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닐까? 태어나면서 혼자가 된 그가 죽을 때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으나 결국 혼자라는 현실은 어쩌면 퀴어적 성애라는 이름으로 규정된 이들이 겪는 불합리한 삶은 아닐까? 어쩌면 겉으로 느껴지는 리의 폭력성이나 위계적 권력은 사실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는 자신이 세상에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을 부르짖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연결되지 못한 그는 그저 연결되기를 원하는 가련한 인간이다.
P.S. 정말 놀랍게도 티켓 들고 사진을 안 찍었다... 시그니처 사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