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CGV.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죽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자기 길을 찾은 나비의 날개짓(4.0)
일본의 대표 감독 중 하나라고 하지만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다. 수많은 그의 필모그래피 중 본 것은 <러브레터>(1995)와 <키리에의 노래>(2023) 뿐이다. 한국에서 감독을 향한 사랑과 팬들이 많기에 가장 많은 경우 새해에, 혹은 봄에서 여름 아니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에 그의 영화를 상영하기는 하지만 인연이 아닌지 그 기회를 놓치고 있다. 그런 와중에 96년작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보게 된 것은 나름 감독과 그의 영화에 대한 인연을 한 번 엮어주는 일이 아닌가 한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러브레터>와 <키리에의 노래> 모두 안 맞는다고 느낀 가운데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오히려 이와이 슌지 감독에 대한 관심을 반등시킨 영화이다. 특히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을 보고 느낀 것은 90년대에서 신세기를 맞이한 수많은 영화 감독 중 하나이자 일본의 버블 경제기와 침체기를 몸소 겪은 감독이기에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과 같은 영화가 그리고 돌이켜보면 <러브레터>나 <키리에의 노래>에서도 그와 비슷한 세기말적 모습이 영화 배경에 혹은 인물에 드러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가상의 도시 엔타운과 그 엔타운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름부터 굉장히 노골적이다. 영화의 설정 중 일본의 화폐인 엔이 가장 강력한 통화로 여겨지는 시대, 그런 엔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모여든 이민자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엔타운은 모두 일본 버블 경제기를 떠오르게 한다. 도쿄의 땅을 팔면 미국 전역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일본 최대 부흥기.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영화는 그러한 최대 부흥기를 떠올리게 하는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엔을 벌기 위해 모여든 이민자들과 그들이 모인 도시를 엔타운이라고 부른다는, 즉 엔을 일종의 혐오 표현의 일종으로 사용한다. 엔만이 아니라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의 일본은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지 않다. 엔타운을 거점으로 혹은 중심으로 마피아, 갱, 야쿠자 등 범죄 조직이 이민자들 혹은 일본 하층민을 통해 마약, 위조 화폐 등을 확산시키고 있음에도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이민자나 하층민을 제대로 보호하거나 관리하지도 못하면서 막상 범죄자들에 대해서는 적법한 수사 보다는 폭력적인 공권력으로 대한다. 누구나 가장 바라는 통화이나 동시에 그것을 바라는 이들을 부르는 멸칭. 가장 번영한 자본주의 국가이나 동시에 혼란스럽고 부도덕한 국가.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일본 버블 경제기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들을 통해 실상은 자본주의의 한계와 그 종말을 그리고 있다.
자본주의가 한계를 보이고 결국 종말을 맞이할 혹은 이미 종말이 도래한 시기에 영화는 희망을 일본 내부가 아닌 이민자들에게서, 특히 정체성이 모호한 이민자 2세에게서 찾는다. 엔타운의 이민자들은 세계 최고의 통화인 엔을 벌기 위해 몰려든 이들로 대부분은 돌아갈 고향이 있다. 엔을 벌기 위해서라면 온갖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페이 홍(미카미 히로시 분), '글리코(차라 분)', '류량키(에구치 요스케 분)' 등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민자들은 대부분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점에서 정체성이 명확하다. 하지만 이들은 엔타운을 거점으로 원어민들이 들으면 부정확한 문법이거나 문맥에 의해서면 대충의 의미만 간신히 통하는 파편화되어 있는 언어로 소통하면서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페이 홍은 중국어와 영어는 하지만 일본어를 하지 못하며 글리코는 중국어와 영어에 일본어가 섞인 말을 하기도 하고 류량키는 중국어와 일어의 악센트가 섞인 영어를 사용한다. 고향이라는 지리적 정체성과 파편화된 언어라는 공동체 정체성은 서로 충돌하고 엔타운은 마치 원시적 공동체와 비슷한 모습을 형성한다. 약육강식과 측은지심이 공존하는 지극히 본래적인 공동체 말이다.
이러한 엔타운 공동체에서 '아게하(이토 아유미 분)'는 불명확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일종의 열린 공동체를 희구하는 인물이다. 아게하의 정체성은 글리코의 무대를 위해 페이 홍이 만든 클럽 엔타운 클럽에서 외관은 백인이나 영어는 할 줄 모르면서 일본어를 원어로 사용하는 서구 출신 이민자 2세대들과 비슷하다. 기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전통 공동체로부터 비롯되며 전통 공동체는 폐쇄적 혈연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하지만 아게하나 서구 출신 이민자 2세대는 외형, 출신 등을 이유로 전통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단순히 혈연을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되 자본에 좌지우지 되는 기형적인 공동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아게하는 엔을 벌기 위해 온갖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던 이전 세대 이민자들의 삶을 보고 배우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삶에서는, 그러니까 단순히 엔만 벌기 위한 삶에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체성이 모호한 엔타운 공동체로부터 어떤 의미에서 서로를 지키고 바라는 것을 이뤄주는 순수한 공동체로부터 배운 아게하는 엔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초월한 인간적 가치를 희구하는 순수성을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난해한 영화 같다. 엔타운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비롯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일본 사회의 모습은 구체적이지 않고 국가 체계가 마비된 것 같은, 아포칼립스에 준하는 이미지들로 그려진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인물들의 대사는 다국적 언어로 난무하며 그들이 겪는 사건은 '랑(와타베 아츠로 분)'의 인물 설정이나 활약에서 알 수 있듯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등장하며 해결되는 듯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실제로 엔타운 공동체의 생활은 이전과 비교해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일본 사회는 여전히 엔타운을 혐오, 배척하고 국가 체계는 마비된 것과 같은 사회이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마냥 모든 사건을 해결하는 듯한 랑과 그의 암살 조직은 그저 몰락을 눈앞에 둔 혹은 이미 몰락한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이미 멸망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가 제시하는 희망은 자본주의 이전의 순수한 공동체은 아닐까 한다. 그저 어쩌다 모인 어중이떠중이라 할 지라도 한 공간에서 살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는 바로 옆의 '우리'. 우리라는 말에 어떤 정체성을 부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