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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리코르디아 단상

신촌. CGV. 미세리코르디아.

by Gozetto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의 욕망과 희미하게 부유하는 하늘의 자비가 공존하는 지상의 일상(4.5)


알랭 기로디 감독의 이름은 얼핏설핏 지나가면서 들어본 적이 있지만 영화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본 영화가 이렇게 자극적이면 앞으로 만나게 될 다른 영화에서 보게 될 감독 혹은 감독을 통해 보게 될 영화는 어떻게 봐야 할지 즐겁게 난감하긴 한데... 그만큼 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복합적인 의미에서 난감하다. <퀴어> 단상에서 말했듯 단순하게 보기 어려운 감독인 듯해서 더욱 그렇다. 그래도 한 번 차근차근 보고 난 다음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해보자. 우선 이 영화의 제목. 프랑스어 Miséricorde를 한국어로 음차해 그대로 제목으로 제시했기에 영화 포스터 외에는 사실상 언어로서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기는 어렵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찾아보지도 않았다. 다 보고 충격 속에서 찾아보니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원래 의미는 기독교적 혹은 종교적 의미에서 자비와 관용, 성직자가 서있을 때 몸을 기댈 수 있도록 벽에 붙인 돌출부, "하느님 맙소사!"와 같은 신을 찾는 감탄사라는 의미가 있다. 성직에 있으면서 의례를 모시며 지친 성직자가 잠시 쉴 수 있도록 하는 자비와 관용의 물리적 형상,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거나 놀라서 주체를 할 수 없을 때 잠시 기댈 수 있는 곳을 바라며 찾는 신의 자비와 관용. <미세리코르디아(Miséricorde)>는 신이 인간사에 행하는 자비와 관용에 대한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는 다층적인 블랙코미디이다. '제레미(펠릭스 키실 분)'를 중심으로 한 관계도는 서로를 향한 욕망이 난잡하게 얽혀 있다. 욕망을 숨기거나 드러낸다는 차이를 제외하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대신 그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마을의 신부 '필리프(자크 드블레 분)'가 제레미에게 친구 '뱅상(장 밥티스트 뒤랑 분)'을 죽일 때 갖고 있는 분노를 비롯한 욕망은 지금 그가 여기 이렇게 살아있게 만든 기반이자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즉, 알랭 기로디 감독은 영화를 통해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간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독이 욕망을 마냥 긍정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영화에서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있는 마을은 어딘가 음습하다. 어린 시절 자주 놀았던 제레미에 대해 뱅상은 그가 엄마 '마르틴(캐서린 프로트 분)'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 여긴다. 마르틴에 따르면 제레미는 죽은 남편에게도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동시에 스스로는 계속 숨기지만 제레미에게 욕정을 갖고 있다. 제레미는 어린 시절 자주 따돌렸다는 '왈테르(다비드 아얄라 분)'에게 성적 욕구를 갖고 있으며 필리프 신부는 제레미에게 욕정을 품고 있다. 이런 이들이 살아가는 마을 뒷편의 산은 해가 잘 들지 않고 안개가 자주 끼는 듯하며 그 덕에 마을 사람들은 버섯을 채집하러 온다. 음습한 숲에서 습기를 머금으며 피어오르는 버섯처럼 마을 사람들의 욕망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언제든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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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왓챠피디아

이처럼 음습한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미세리코르디아>는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하지 않는 듯하다. 인물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그린다기 보다는 인간들이 겪는 삶을 욕망으로 그려내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가을에는 거의 날 일이 없는 버섯이 뱅상의 시체에서 양분을 먹고 자라 제레미의 식탁에 오르는 모습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에 대한 블랙코미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필리프 신부가 제레미에게 한 말처럼 욕망이 삶에서 만연하다는 표현을 넘어 자연스럽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즉, 그러한 욕망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관객의 몫일 뿐이라는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제레미를 중심으로 인세를 관찰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죄악으로 여겨지는 욕망에 의해서 작동하는 인간들의 세계를 신이 바라보는 시선인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봤을 때 <미세리코르디아>의 카메라는 최소한 두 개의 블랙코미디적 시도를 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는 카메라의 시선이 신의 시선이라면 신은 이렇게도 욕망에 찌든 인간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블랙코미디이다. 여기서는 존재론적 블랙코미디가 있다.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인데 이 경우 욕망 역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을 죄악으로 본다는 것 자체는 어딘가 어폐가 있다. 욕망도 신의 산물이라면 인세에 대한 신의 사랑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사랑을 자비나 관용이라 부르는 것은 죄 지은 자가 제 발 저려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인간이 나약하기에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즉,인간의 존재론적 불완전성을 꼬집는 블랙 코미디이다.


둘째로 카메라의 시선이 신의 시선이라고 했을 때 그 시선은 관객의 시선과 일치한다. 이 관점은 앞의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한 인간 존재에 대한 블랙 코미디와 연결되는데 신의 시선이 관객의 시선과 일치한다고 한다면 결국 신은 관객이다. 그렇다면 사실 신이라는 것은 허상이라는 신성모독스러운 관점이 있게 된다. 즉, 애초에 인세에 대한 신의 자비 혹은 관용이라는 것은 사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행동을 위로 혹은 용서 받기 위해 신이라는 허상을 제시한 것이 된다. 하지만 앞의 관점과 다르게 신이 관객이라는 관점은 우리가 서로에게 타인이라는 신이면서 동시에 동일한 인간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에 따르면 결국 인세를 인간의 욕망으로 찌들어 음습한 곳으로 보든, 인간의 욕망으로 찌들어 있으나 그러한 찌듬을 용서가 보듬고 있는 곳으로 보든 그것은 같은 인간의 서로 다른 관점일 뿐이라는 것이 된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결국 그것은 관객이라는 신과 같은 동일한 인간 개인의 관점이기에 그것은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저 그런 관점의 욕망을 가진 인간이 스크린 너머 현실에서 그 욕망에 의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풀어내느냐의 문제는 결국 스스로가 판단할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미세리코르디아>라는 영화와는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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