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씨네큐브. 발코니의 여자들.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무의식적, 사회적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저항하는 프렌치 코미디(3.5)
생물학적 성인 여성에 부여되는 젠더적, 섹슈얼리티적 고정관념에 저항하는 프렌치 코미디이다. 2024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과 2025 전주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부문 상영작이기도 하며 국내에서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로 잘 알려진 노에미 메를랑이 감독과 주요 인물인 '엘리즈'를 연기해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영화이기도 했다. 발코니에서 반대편 아파트를 바라보는 세 여자의 뒷모습과 "이 영화에서 '여자'는 죽지 않습니다."라는 표어가 적힌 포스터나 마찬가지로 발코니에서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되 뭔가를 보고 공포에 질린 듯한 세 여자의 앞모습, 그 위 발코니에는 누군가의 시체가 있는 포스터도 서로 상반되어 더욱 궁금증을 일으켰다. 특히나 마릴린 먼로 같은 분장을 하고 나타난 노에미 메를랑 배우의 모습이나 히치콕 감독의 <이창>(1954)이 떠오르는 아파트 발코니의 풍경은 여성을 향한 시선을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되어 어떤 식으로 시선을 비틀면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여성을 향한 시선에 대해서 상당 부분 바로 지금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발코니라는 공간은 모순된 공간이다. 개인의 사유지인 집의 일부분이기에 사적 공간이지만 동시에 바깥으로 공개되어 있어 공적 시선 혹은 인식이 끊임없이 침범하는 공간이다. 이때의 공적 시선 혹은 인식은 개개의 사적 시선 혹은 인식의 총합으로서 공적이기에 온전한 의미에서 공적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이처럼 모순된 공간에서 여성들은 지구 이상 기후로 쪄 죽을 것 같더라도 생물학적 성과 젠더적, 섹슈얼리티적 성의 일치로 성적 대상으로 여겨져 상의를 벗는 것과 같은 행동은 할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 '루비(수헤일라 야쿠브 분)'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신체를 노출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나 여성의 신체 노출은 언제나 평범한 신체가 아니라 성적 신체를 노출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인터넷 19금 방송 BJ라는 것에 대해 루비 스스로는 성적 자유에 따른 자신의 권리이며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직업적 행위로 때로는 시청자들이 심리 상담을 통해 치유받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이기에 루비에게 가해지는 성적 폭력은 그가 남성들에게 그러한 폭력을 가하도록 만든 원인이라는 핑계 혹은 반론을 통해 정당화된다.
엘리즈의 남편 '폴(크리스토프 몽테네즈 분)'이 엘리즈에게 언제나 자신만 섹스를 원한다고, 항상 관계를 피하는 것은 엘리즈라고 쏘아 붙이는 것도 루비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궤를 같이 한다. 여성의 신체가 어떤 상태인지 보다 남성의 성적 욕망이 얼마나 큰지가 최우선인 상황에서 섹스를 하기 전 여성의 신체적, 감정적 상태, 여성이 섹스를 통해 느끼는 만족감 등은 섹스라는 행위에서 중요하지 않다. 엘리즈가 폴을 만나러 가는 길 몸을 드러내는 듯한 엘리즈의 복장 때문인지 이른바 한 번 자보려는 심산으로 그게 아니라 해도 어떤 이유에서든 그에게 추파를 던지며 접근하는 남성들의 모습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 특히 남성으로부터 발출되는 시선이 섹슈얼한 의미에 국한되어 있음을 보인다. 심지어 섹스라는 행위를 더 갈구하는 것은 남성임에도 항상 그러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것은 여성의 신체에 의해서라는 점은 굉장히 회피를 위해 만들어낸 아이러니로 느껴진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성폭행을 하려다가 사고로 죽은 앞집 남성 '마냐니(뤼카 브라보 분)'의 귀신을 보는 '니콜(산다 코드레아누 분)'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 어쩌면 가장 슬픈 아이러니일 것이다. 작가 지망생 혹은 작가인 니콜의 존재는 영화의 사건이 실제 사건인지 혹은 그가 준비 중인 이야기인지 혼란스럽게 한다. 그가 귀신을 본다는 점은 살인 사건에 대한 실재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살인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안 했는지가 아니라 니콜이 살인 사건을 실제로 접한 이후 혹은 상상한 이후 죽은 남성들의 귀신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죽은 남성들은 모두 하나 같이 자신들이 죽을 이유가 없다며 억울하다며 죽음에 대해 항변한다. 사건과 귀신이 모두 실재인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니콜이 보는 귀신들의 항변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적 고정관념, 즉 여성의 신체를 성적 신체로만 보는 사회적 시선이 여성인 니콜에게도 내재되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콜은 발코니에서 자신의 신체를 노출하는 루비를 말리거나 남성 앞에서 춤을 추거나 신체를 접촉하는 행위를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여성들이 조심하더라도 남성들이 신체를 성적으로만 바라보는 이상 사건의 책임은 여성들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책임, 즉 상대방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혹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자 정당방위 중 발생한 사고였음에도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이 니콜에게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죄의식은 그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서 치유된다. 오랜 시간 자신의 성폭행과 정당방위에 대해서 고통스러워 하는 루비,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음에도 어떤 상태인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성폭행과 같은 섹스만을 강요하는 남편과 이별 및 이혼을 선언하는 엘리즈. 마냐니의 시체를 유기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신체에 가해지는 사회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며 니콜은 마냐니의 귀신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라지는 것을 통해 자신을 짓누르는 죄의식에서 벗어난다. 죄의식에서 벗어난 세 여자를 비롯해서 상의를 자유롭게 벗어 던진 여성들이 남성들이 없는 거리를 활보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신체에 죄의식을 심어놓는 사회적 고정관념의 존재를 분명하게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