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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단상

용산. CGV. 이사.

by Gozetto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던져진 폭력에 홀로서기까지 강요하는 세계, 아이는 스스로를 축하한다(4.5)


4K 리마스터링 덕분에 과거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좋은 영화를 스크린을 통해 처음 보게 되는 것은 언제나 기대되는 일이고 보게 되는 순간은 정말 짜릿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짜릿한 순간을 맛본 영화 중 하나인 소마이 신지 감독의 <이사>(1993)는 감독도 영화도 알지 못했으나 스크린으로 보기 전 포스터를 보자마자 직감한 영화 중 하나였다. 스크린으로 첫 경험을 해야 하는 영화구나! 보통 이런 생각이 든 순간 어떻게든 영화관에서 보고 싶다는 욕망이 찬다.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한동안 인생을 비관하며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시체로 살아가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다음 인연이 있겠지 하면서도 그게 언제려나 하면서 아쉬움을 차곡차곡 쌓아 꾹꾹 눌러담기는 한다. 언제고 기획전이든, 특별전이든, 어떤 경우 혹은 경로로든 스크린으로 보게 될 날을 기다리는 인고의 감정을 묵혀두는 것이다. 감정을 너무 오래 묵혀두면 잠시 잊는다 해도 떠오르는 순간 묵혀둔 감정의 맛에 우울감이 든다. 그런 점에서 4K 리마스터링으로 개봉하게 된 <이사>를 극장에서 바로 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인 정신 건강에 굉장히 좋은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소마이 신지 감독과 처음 만난 <이사>는 아이가 중심인 영화들을 떠오르게 하면서 굉장히 모순적인 인식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루시바 렌코(타바타 토모코 분)'가 도달한 결론은 정말 렌코가 본인 스스로에게 외친 것처럼 축하할 일일까? 태어남은 곧 던져짐이다. 누구도 세계에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날 때부터 거대한 폭력을 당한 것과 같다. 그러한 폭력의 책임이 부모에게만 있다 할 수는 없을 테지만 아이에게 자기 존재의 근간이기도 한 부모는 던져짐의 폭력에 대해 1차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부모에게 그러한 책임을 요구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는 다하라는 명령, 못해도 요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이 없다. 폭력의 피해자이나 자신의 피해에 대해서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는 가장 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렌코가 엄마 '나즈나(사쿠라다 준코 분)'와 아빠 '켄이치(나카이 키이치 분)'의 이혼에 저항하고 좌절하는 모습은 아이가 던져짐의 피해자로서 가장 약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이사>가 일으키는 모순적인 인식과 감정은 단순히 아이에 대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던 것을 다시 깨닫게 되어 발현하는 것은 아니다. 마을 축제에서 다리 위 엄마를 보며 빨리 어른이 되겠다고 말하는 렌코의 장면부터 보자. 빨리 어른이 되겠다는 렌코에게 엄마는 기특하다는 듯 웃는다. 그런 엄마를 본 렌코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자신을 돌봐준 노인에게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건강하시라고 하며 작별 인사를 건넨 뒤 도망친다. 노인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음에도 내년에 보자는 렌코의 인사는 예의상 한 말이라기 보다는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아이의 고집처럼 느껴진다. 답답한 집구석에서 나가 혼자 살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 등 자기 욕망이 가장 중요한 아빠에게 이미 실망했음에도, 그러니까 이제는 가족이 정말 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에도 가족들이 모두 행복했던 휴양지에 내년에는 다시 행복한 가족으로 올 것이라는 고집. 어쩌면 내년에는 할아버지를 보러 엄마, 아빠와 함께 올 수 있을 것이라는 고집. 그렇기에 자신을 찾으러 온 엄마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도망간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과거 가족 모두가 행복한 물놀이를 했던 환상에서 가족이 끝내 행복한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자신을 안아준 뒤 불타는 과거를 향해 양팔을 흔들며 축하한다고 하는 장면을 보자. 이 장면에서 축하한다고 외치며 양팔을 흔드는 렌코의 모습은 과거와 안녕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여기 있다고, 구해달라고 하는 조난자처럼도 보인다. 과거와 작별하며 어른이 되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과 아직 부모가 필요한 어린 자신이 여기 있다고 하는 것이 공존하는 것이다. 불타는 과거를 향해 축하하는 장면 이전에 렌코는 밤새 걷고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산과 숲을 헤맨다. 요정이 살고 달빛이 감싸는 동화 속 산과 숲이 아니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어둡고 고요할 뿐인 산과 숲이다. 렌코에게 이 산과 숲은 부모의 싸움을 참고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을 무시한 채 서로가 서로를 참지 못하는 엄마, 아빠만큼이나 자신에게 무관심한 세계를 느끼게 한 듯하다. 그런 세계에서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 고작 6학년인 렌코에게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 것은 결국 부모와 주변인들, 그러니까 우리 자신 아닐까?


결과적으로 <이사>는 성장이라고 하는 당연한 과정이 사실은 아이에게 다른 의미에서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적절한 순간에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보호받는 것이 불가능한, 즉 날 때 겪은 던져짐의 폭력을 한 번 더 겪은 아이들에게 성장은 당연한 과정이 아니라 강요의 폭력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엄마와 신체를 접촉하지 않은 채 앉아 있고 장난처럼 보이나 끝내 과자를 나눠 먹지 않는 렌코의 모습은 부모를 향한 감정과 믿음을 모두 차단한 것처럼 보인다. 같은 반 친구들과 선생님이 함께 하교하는 길에서 홀로 벗어나 렌코가 모든 것을 다 관찰하고 적절하게 처리하는 듯한 모습, 특히 엄마에게는 꽃을 선물하며 감정을 보살피고 아빠에게는 술을 마시지 못하게 막는 모습은 렌코가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성장이 정말 렌코를 축하할 수 있는 성장이라 할 수 있을까? 아이를 애늙은이라고 할 때 그것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아이가 나이보다 어른스럽게 행동해도 결국 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렌코의 모습은 애늙은이가 아니라 원래 나이를 훨씬 넘어 정말 어른이 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를 향한 렌코의 손짓이 작별보다는 구조의 신호에 더 가까웠던 것처럼 느껴져 렌코의 성장이 축하한다는 말과 달리 씁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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