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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 단상

영등포. 롯데시네마. 로마의 휴일.

by Gozetto

*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서사의 한계를 극복하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장점(3.5)


가끔 불현듯 떠오르는 카페가 있다. 문래에 있는 카페 1953 위드 오드리라는 곳으로 오드리 헵번을 정말 사랑하시는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다. 오드리 헵번이 연기했던 인물들의 모습으로 만든 인형들에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의 포스터, 영화에서 사용됐던 소품,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은 카페보다는 오드리 헵번 박물관, 전시회, 아니면 아카이브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장소이다. 오드리 헵번이라는 배우가 활동했던 시기의 영화, 그러니까 흔히 고전 영화로 분류되는 범주의 영화들을 많이 보지 못한 터이고 거의 대다수의 영화를 디지털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들로 본 만큼 애초에 오드리 헵번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대단한 위상을 갖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어린 시절 TV에서 본 예능 프로그램에서 언급되면서 보이는 자료 화면과 설명 등을 통해 얼굴 정도만 익혔고 대학 시절 들은 연극, 뮤지컬, 영화 관련 강의에서 스쳐 지나가듯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카페 1953 위드 오드리는 몰랐던 배우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얼마나 사랑받은 배우인지를 느끼게 한 장소이기도 하다. 오드리 헵번을 향한 사장님의 애정과 다양한 오드리 헵번의 매력을 느끼러 가보길 추천하는 바이며 오드리 헵번이 생전 즐겨 먹었다던 오드리초코케이크도 먹어보길 바란다. 누군가를 향한 애정이 녹아든 공간에서 그의 다양한 매력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행복한 경험일 것이다.


각설하고 지난 20일부터 롯데시네마에서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1953)가 개봉 7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되어 상영 중이다. 귀동냥으로만 듣고 어렴풋이로만 느낀 배우지만 그럼에도 50년대 영화를, 그것도 당대 가장 사랑받은 배우 중 한 명인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으니 당연히 놓칠 수 없는 기회이니 이번 기회로 꼭 보길 바란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스크린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겠는가.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로마의 휴일>은 대단히 잘 만든 마스터피스는 아니다. 영화는 나쁘게 말하건 좋게 말하건 한 마디로 로마 배경의 오드리 헵번 화보집이라고 해도 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절대 불가능할 낭만이 살아숨쉬고 있으면서도 오늘날의 일면들이 떠오르면서 조금은 씁쓸한 구석도 느껴지는 영화이다. 전자의 지점은 많은 부분 영화가 의지하고 있는 오드리 헵번에 의해 발현되는 듯하다. 가상의 왕국에서 유럽을 순방 중인 '앤(오드리 헵번 분)' 공주가 살인적인 순방 일정에서 잠시 도망치기 위해 오밤중 숙소를 빠져나갔다가 특종을 노리는 미국인 기자 '조(그레고리 펙 분)'을 만나 로마에서 꿈같은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 영화의 이야기는 왕국과 그 곳의 공주인 오드리 헵번이라는 가상에서 시작해 대단히 할리우드다운 라라랜드를 만들어낸다.

출처. 왓챠피디아

<로마의 휴일>이 만드는 할리우드스러운 라라랜드는 앤 공주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어떤 가상 왕국의 공주이며 그가 유럽을 순방 중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순방 소식을 영화의 제작자사이면서 영화 내적으로는 뉴스 방송이기도 한 파라마운트가 영어로 전한다. 영화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마셜 플랜이 한창 진행 중인 시기에 제작되어 개봉한 것을 생각하면 앤 공주와 그의 왕국, 앤 공주의 유럽 순방, 순방 소식을 전하는 파라마운트 등은 영화 외적으로도 이미 유럽 전역에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을 미국의 자본력을 할리우드 영화스럽게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자본의 침투가 오드리 헵번을 거쳐 스크린에 펼쳐지는 순간 침투는 노골적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비가 우아하게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런 공격성이 느껴지지 않는 오드리 헵번이 티아라에 드레스 차림으로 우아하게 파티에 참가한 유럽 고위 인사들을 맞이하는 장면은 살인적인 순방 일정에 지쳐 발을 꼼지락거리며 구두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피곤한 기색과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부드럽게 웃는 모습 등과 함께 관객의 넋을 빼놓는다. 앤 공주가 야밤에 몰래 빠져나가기 전까지 영어를 쓰는 가상 왕국의 공주라는 설정은 이러한 오드리 헵번의 모습과 함께 넋이 빠진 관객에게 잠시나마 '어쩌면 나도 어딘가의 왕족일지도...', '그렇다면 나는...'과 같은 상상을 하게 만든다.


앤 공주가 야밤에 몰래 빠져나갔다가 조와 함께 로마를 둘러보는 이야기도 그렇다. 공주라는 사실을 숨긴 채 로마의 명소를 둘러보며 평민의 삶을 즐기며 정치적 스케쥴에서 완전히 벗어난 앤의 모습은 홀가분하다는 말로는 부족해 보인다. 온전한 자유를 있는 그대로 즐겨 굉장히 순수하다고 느껴진다. 스쿠터를 직접 몰며 위험천만한 주행을 펼칠 때는 정말 즐겁다는 웃음을 짓고 전날 고위 인사들과 돌아가며 춤을 췄을 때와 달리 선상 파티에서는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진실의 입 앞에서 손을 집어넣을지 말지 긴장한 모습, 조의 박진감 넘치는 물린 연기에 진심으로 놀라 비명을 질렀다가 그의 장난에 웃으며 타박하는 모습 등. 영화는 오드리 헵번이 가지고 있는 외모의 매력을 십분 활용해 활기와 생명력이 넘치는 순수한 이미지로 관객에게 꿈같은 휴일을 선사한다. 단순히 오드리 헵번의 외모만이 아니라 영화의 로마는 지금의 우리가 전해 듣거나 보는 로마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지금보다 더 한적한 도시와 그런 한적한 공간에서 더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보이는 영화 속 로마는 오버투어리즘으로 도시가 죽어가는 현실과는 정반대라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그런 와중에 히스테리가 일어날 정도로 쫓아오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다 쉼을 위해 도망치는 앤 공주의 모습은 일상에서 이리저리 치이다 지쳐 쉼을 찾으러 영화관에 온 관객들에게 현실성을 높이는 공감을 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로마의 휴일>은 제목처럼 앤 공주의 꿈 같은 하룻밤 휴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친 일상을 완전히 잊고 도주할 수 있는 할리우드의 라라랜드에서 즐기는 휴일을 선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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