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인디스페이스. 3학년 2학기.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차갑고 냉랭한 사회에서 우직하게 베이며 삭히기만 하는 미래의 현실(4.0)
대학원 졸업 전까지는 안양시의 평촌에서 살았다. 지금의 위상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 입시에 대한 교육열이 활활 타오르던 시절 평촌 학원가는 학생들로 붐볐다. 2년 전엔가 갔을 때에도 꽤나 붐볐지만 필자가 중고등학생일 시절과 비교하면 정말 많이 줄은 편이다. 22시 이후부터 학원 운영을 금지하는 법안이 있기 전까지는 자정에도 대형 학원에서 운영하는 대형 버스와 공중버스, 학생들을 마중 나온 부모들의 자가용, 지나가는 다른 차들 등이 학원가와 인근 도로를 가득 메우기도 했다. 그만큼 인문계고, 외고, 과고, 자사고 등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가 강세인 지역이었고 지역에 특성화 고등학교들도 몇 군데 있었으나 사실상 접점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성화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실제로 어떻든 간에 대체로 좋지 못한 인식과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르게 말하면 대학 진학 이외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고등학생들의 삶은 모르는 것이면서 편견으로 점철되어 어렴풋하게만 인식되고 잊고 지낸 삶이었다.
<3학년 2학기>는 졸업을 앞두고 현장 실습을 나가는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 '창우(유이하 분)'의 삶을 중심으로 잊고 지냈던, 다른 고등학생들의 삶을 보인다. 아니다. 단순히 고등학생들의 삶이라고 하기는 어렵겠다. 고등학생과 노동자라는 경계 위에 존재하는 이들의 삶을 보인다. 영화는 아무런 음악 없이 오직 창우 주변의 음향만으로 청각적 배경을 그린다. 창우의 주변은 흔하게 울려 퍼지는 가게의 아이돌 음악도 들리지 않는다. 창우의 삶은 공간적으로 학교, 집, 현장 실습을 나가는 기업으로만 한계가 지어져 있다. 생활권의 한계만큼이나 창우의 꿈과 같은 미래지향도 동생의 입시를 포함해 당장의 가족의 생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정도로 근시안적이다. 청각의 한계, 공간의 한계, 미래지향의 한계가 겹치고 겹친 창우의 삶은 멀리 희미하게나마 밝게 보이는 목표조차도 그릴 여유가 없는 혹은 그런 여유 자체를 알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처럼 보여 더욱 삭막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창우의 삶은 창우에게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속해서 수렁에 빠져야 하는 혹은 빠지는 듯한 선택을 강요한다. PC방을 가자는 친구 '우재(양지운 분)'의 제안에도 속 편하게 가자 말하지도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는 창우는 홀로 일하는 '엄마(강진아 분)'를 도와 생활비와 동생 입시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병역의 특혜와 대학교 진학이라는 불확실한 이점을 내세운 위험한 중소기업을 실습 장소로 선택하고 버텨야 한다. 기업의 선임이 작업 교육을 감정적으로 하는 것은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육 방식의 문제이니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정 장비나 장치가 미비해 언제 어디서 부상과 죽음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라는 점은 버텨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러한 문제는 자본과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 묵살되고 해결되지 않아 발생하는 위험은 노동자가 견뎌야 하는 압박과 부담으로 남게 된다. 노동 없이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현실을 살아야 하는 창우에게 이러한 압박과 부담은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상처가 몸에 남아도 삭히며 버텨야 하는 현실로 여겨지게 된다.
창우 보다 앞서 현장에서 실습 중인 학생들도 비슷한 사정이긴 마찬가지이다. '다혜(김소완 분)'는 실습 중인 기업이 비전이 없다고 말하지만 결국 그곳에 취직하기로 한다. 동남아 여행을 계획 중이라고 한 협력사의 형 '수호(유명조 분)'는 과로로 쓰러져 결국 목숨을 잃는다.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병역 특혜에 추천된 '성민(김성국 분)'은 노무사에게 안전 장비와 장치가 미비한 기업의 상황을 말하고 퇴사한 이후 배달일을 하며 살아간다. 창우를 비롯한 학생들은 우리 모두가 그렇듯 노동을 해야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동시에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으로 점철된 노동 현장에서 버티는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학생과 노동자의 경계에 서있는 이들까지도 버티는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과연 안전할 수 있는 이들이 있을까?
영화에서 창우는 실습을 나갔던 기업에 결국 취직할 수 있게 되고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주말에는 전문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며 캠퍼스 라이프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성민의 고발로 현장에는 그라인딩 작업 중 안전 장비인 고무 앞치마가 생겼고 창우 이후 실습생들은 안전 장비를 착용한 채 현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과로로 죽은 형이 사고가 난 현장과 유사한 현장일, 배달 온 장비와 물품을 받아 보관하는 2층에는 장비와 물품이 혹은 노동자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할 안전 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여전히 지게차로 장비와 물품을 올리고 노동자가 그 위에서 몸을 위험천만하게 몸을 내밀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며 작업을 한다. 실습 중 팔뚝이 잘리는 큰 부상을 입은 적 있는 창우는 손과 팔에 더 많은 상처가 나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기타를 치는 창우처럼 조금씩 바뀌고는 있지만 여전히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은 버티며 삭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현장. 과연 그 현장은 노동자들에게 더욱 안전한 현장을 기대하게 하는 위로일지 아니면 위험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버티게만 하는 고문일지. 확실한 것은 학생일 때든 노동자일 때든 창우는 여전히 냉정한 사회에서 상처를 입어도 삭히며 버티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