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CGV. 콘티넨탈'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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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에 안정은 바라되 일상 속 혐오는 도외시하는 시대(4.0)
<배드 럭 뱅잉>(2021)으로 만나게 된 라두 주데 감독의 작품으로 펜데믹 시기를 지나며 진행된 극우화에 우리 일반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풍자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집도 직업도 없는 노숙자가 쓰레기를 수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노숙자가 쓰레기를 줍고 있는 공간, 노숙자의 인물성으로 풍자를 시작한다. 노숙자가 걷고 있는 공원의 길은 낙엽으로 덮여 있고 주변은 잘 보존된 숲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노숙자의 걸음걸음마다, 길을 좀 벗어난 물웅덩이에까지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마치 겉으로 보기에는 고즈넉해 보이는 공원의 이곳저곳에서 쓰레기가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공원은 조악해 보이는 공룡 로봇(?)으로 꾸며져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원의 아주 일부만 공룡이 있었던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로봇을 세워둔 것처럼 보인다. 공원을 벗어나 다시 도심부로 노숙자가 돌아갈 때 도로 한복판에는 루마니아 총리의 정치적 선전이 적힌 커다란 빌보드가 있는데 이 빌보드에는 국가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하겠다는 정치적 선전이 적혀있다. 이후 한 때 유명한 루마니아의 운동 선수였던 노숙자는 자신을 배척하는 시민들과 복지 제도조차 없는 것으로 보이는 사회의 배제 속에서 자살을 선택한다. 라두 주데 감독이 바라보는 루마니아 사회는 공원처럼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나 실제로는 곳곳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곪고 있는 사회인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정치권은 공원의 자연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보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것 같은 공룡 로봇에 예산을 쓰는 것처럼 사회 전반의 유지와 복지에 무심한 듯 보인다.
하지만 <콘티넨탈' 25>에서 라두 주데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곪아가고 있는 문제들과 문제에 대한 해결 대신 그저 겉으로만 화려해 보이려는 정치권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사회에서 '오르솔리아(에스테르 톰파 분)'로 대표되는, 아주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개인들의 모습이다. 오르솔리아가 살고 있는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과거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 분쟁 지역이었으며 그에 따라 루마니아의 영토가 된 현재에도 헝가리 혹은 헝가리계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차별과 혐오는 과거 유명 운동 선수였으나 자살을 선택한 노숙자에 대해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루마니아 언론을 통해서 먼저 드러난다. 헝가리계이자 법원의 집행관인 오르솔리아는 노숙자가 무단취식하고 있는 건물이 호텔로 재건축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건설사와 몇 차례 협의하며 퇴거를 최대한 늦췄지만 더 늦출 수 없어 그에게 퇴거를 명령한다. 그러한 퇴거 명령에 노숙자가 자살을 선택한 것에는 루마니아 사회와 정치에 의한 문제점들이 있을 것이지만 루마니아 언론이 초점을 맞춰 보도한 내용은 '헝가리계' 오르솔리아의 퇴거로 '루마니아'의 영웅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오르솔리아가 노숙자를 살리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했다는 사실은 아예 없다. 사건의 전반적인 사실, 사건과 정치·사회의 연관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보도가 아닌 사실의 일부인 민족주의적 편향성에 따른 자극적 보도는 빠르게 확산되고 인터넷에는 오르솔리아만이 아니라 반헝가리, 반헝가리계에 대한 혐오 댓글들이 양산된다.
이처럼 사회에 극우적 혐오가 만연한 가운데 오르솔리아의 행동은 개인적인 죄책감에서 벗어나 안도에 도달하고자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퇴거 명령으로 노숙자가 자살했다는 죄책감에 빠진 오르솔리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지인들과 공유하며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오르솔리아가 느끼는 죄책감은 개인적인 도덕적 위기이자 그가 노숙자 문제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르솔리아는 정치적·사회적으로 노숙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해결 방안을 궁리하기 보다 친구, 엄마, 과거의 제자 '프레드(아도니스 탄차 분)', 신부 등 지인을 만나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씻어내려고만 한다. 이처럼 죄책감에서 벗어나 안도에 도달하려고 하는 오르솔리아의 모습은 영화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극우적 차별과 혐오에 서서히 곪아가는 사회와 그러한 사회에 대해 아무런 대책 없이 그저 공룡 로봇과 같은 근시안적 성과에만 집중할 뿐 사회적 합의와 통합을 위한 장기간의 정치적 활동 및 제도에는 무관심한 정치권을 지워버린다. 특히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오르솔리아는 극우적 차별과 혐오가 조용히 만연해있는 루마니아 사회의 일면을 만나게 됨에도 그러한 차별과 혐오에는 무감각하거나 도외시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의 카메라는 오르솔리아의 모습을 지인과 오르솔리아 사이에서 제3자인양 중립인 것처럼 서있는다.
하지만 눈여겨 볼 것은 영화에서 지인들에게 노숙자가 자살하기 전후의 모습을 공유하는 오르솔리아의 이야기 중 노숙자의 시체에서 체액과 오줌으로 악취가 났다는 이야기와 퇴거 명령을 가능하면 겨울은 피해서 내리려고 노력한다는 말을 반드시 포함시켜 관객이 듣도록 했다는 것이다. 자살하면서 나오는 체액과 오줌으로 악취가 나는 노숙자의 시체는 루마니아계이건 헝가리계이건 죽음을 맞은 인간이면 당연히 나게 되는 악취이면서도 그가 자살을 선택하게 된 과정을 돌아보면 시체의 악취는 루마니아의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고찰해야 함을 시사한다. 하지만 노숙자의 시체에서 악취가 나 오히려 그가 너무나 끔찍해 보여 혐오스러웠지만 동시에 더 불쌍해 보였다는 오르솔리아의 말에 의해 악취는 단순한 개인의 비극으로 치환된다. 오르솔리아의 이야기를 듣는 지인들도 노숙자를 죽게 만든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 그런 순간에 죄책감을 느끼는 오르솔리아를 위로하고 있을 뿐이다. 노숙자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언론의 자극적 보도, 극우적 혐오의 순간적 유희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한 개인의 죄책감과 그에 대한 감정적 안도의 도구로 소비되는 것이다.
퇴거 명령에 대한 오르솔리아의 변명과도 같은 배려 역시도 노숙자의 죽음을 죄책감과 안도의 도구로 소비한다. 특히 오르솔리아가 퇴거 명령을 가능하면 겨울을 피해서 하려고 한다는 말을 하기 전 건설업계와 정치권의 유착이 있을 것이라 자신이 퇴거 명령을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은 오르솔리아의 회피 심리를 유추하게 한다. 실제 유착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으레 그러니까 당연히 있을 것이며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인도적인 행위는 겨울을 피해 퇴거 명령을 내린다는 오르솔리아의 논리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관료주의의 일원이자 중산층이라는 사회 소시민이기에 나오는 회피주의이자 개인으로서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기 어렵다는 회의주의라 할 것이다. 이러한 회피주의와 회의주의의 모습은 자신의 죄책감으로 노숙자의 죽음을 소비한 이후 오르솔리아가 자신을 만날 때면 헝가리계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죄책감을 느낀다는 루마니아계 친구와는 자신의 죄책감으로 대화의 주제를 다시 돌리거나 루마니아에 대한 맹목적인 차별과 헝가리로 가지 않은 것으로 탓하는 엄마와는 대화를 회피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퇴거 명령에 대한 오르솔리아의 변명은 노숙자의 시체에서 나는 악취와 마찬가지로 예를 들면 공원의 공룡 로봇이나 신도시에 새로 짓고 있는 중국식(?) 아파트처럼 퇴거 명령과 연관이 있을 정경 유착의 문제나 실제 해결해야 하는 사회적 합의와 통합의 문제를 후경화하고 개인적인 죄책감에 대한 안도만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회의주의와 회피주의가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는 상황에서 개인의 죄책감을 씻어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오르솔리아를 겉으로 보기에 중립적으로 찍는 영화의 카메라에 대해 영화는 관객이 불편하도록 짜여져 있다. 지인들을 통해 루마니아 사회의 차별과 혐오의 일면을 보게 되는 오르솔리아는 프레드를 만나서는 자신의 죄책감을 토로하기 보다 불교 선종의 깨달음의 일화로 가득한 프레드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할 뿐 술을 마신다. 뜬구름 잡는 듯한 깨달음의 일화로 마치 지인과 만나 나누던 죄책감을 덜어내려던 일은 없었던 일인 것처럼 지워지고 도시의 야경이 보이는 공원에서 프레드와 열락의 관계를 맺고는 더러운 것을 게워내듯 구토 후 숙취를 느낀다. 프레드를 만난 이후 신부를 만나기 전 노숙자가 쓰레기를 줍던 공원의 나무에서 주기도문을 외우고 신부에게 다시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노숙자의 자살에 대해서 전하는 오르솔리아의 모습은 그가 이제 어떤 죄책감을 덜어내려고 하는 것인지 헷갈리기만 하다. 프레드와 하룻밤에 대한 죄책감인지, 자신의 죄책감을 이유로 가족 여행을 함께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인지, 자신의 퇴거 명령으로 자살을 택한 노숙자에 대한 죄책감인지. 표면상으로는 노숙자에 대한 일을 토로하고 있으니 노숙자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했을 때에도 여전히 오르솔리아가 무의식적 회의주의와 회피주의에 기반해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오르솔리아의 죄책감이 자살을 선택한 노숙자가 죄인이라 말하는 종교적 구원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더욱 노숙자의 죽음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회의 차별과 혐오는 설 자리를 잃는다.
계속해서 후경화되는 사회의 차별과 혐오에 대해서 한없이 중립인 양 시선을 보내고 있는 카메라가 관객은 불편하다. 다르게 말하면 어쩌면 사회의 차별과 혐오에 대해서 중립이라 하며 가만히 보고만 있는 우리 일반의 시선과 같은 카메라의 중립적 시선을 통해 <콘티넨탈' 25>는 강한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다. 오르솔리아가 지인들을 만나 죄책감을 토로하고 위로 받는 신 사이에는 평온하게만 보이는 루마니아 도시의 풍경이 보인다. 영화의 배경인 트란실바니아의 중심 도시 클루지이든 혹은 어느 동유럽의 현대적 도시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 어느 도시든 민족주의이든, 남성우월주의이든, 자국우선주의이든 다양한 형태의 극우적 차별과 혐오가 도처에서 곪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 정치권은 그러한 차별과 혐오를 보지 못한 듯 사회적 합의와 통합을 위한 복지나 사회 정책은 마련하지 않으면서 공룡 로봇처럼 왜 하는지도 모르는 정책에는 예산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언론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는 극우적 차별과 혐오로 자신의 정체성과 감정을 과도하게 표출하고 소비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우리는 다양한 이유에서 중립을 내세우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곧 우리는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평온하면서도 더 크고 화려해지는 문명의 공간이 차별과 혐오에 썩어 문드러지고 결국 무너질 것을 말이다. 그러한 결론과 결론으로 나아가는 중립의 과정이 싫다면 지금의 그 불편함을 원동력으로 일어서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자신의 죄책감에 안도만을 바라며 살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