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메가박스. 머터리얼리스트.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감정을 물질로 보이는 것보다 물질로 감정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던지는 직구(3.5)
현실 감각과 순수함이 치열하게 갈등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강한 영화이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 외적으로 먼저 이야기해보자. 물질주의자라는 의미의 영화 제목과 같이 물질주의가 얼마나 실제 현실에서 만연한지 필자는 정확히 잘 모른다. 필자를 비롯해서 주변의 사람들이 특별히 덜 속물이라 그런지 혹은 앞에서는 덜 속물인 척하는 위선자들이라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런 사람들이라 해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결국 나이가 적든 많든 사랑에 드는 물질적 비용이 증가하고 있고 나이가 들수록 그 비용은 점점 커진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물가 상승만 고려해봐도 1인의 생활비와 비교해 2인의 연애 비용은 단순히 2배 증가하는 것보다 더 크게 증가할 것이다. SNS로는 비슷한 나이대임에도 온갖 화려한 사생활을 누리고 사는 이들이 보이니 취향의 유무와는 별개로 자연스럽게 고급 문화, 취향 등의 콘텐츠에 관심이 가게 된다. 그러다 한 번 경험하면 원래 자신에게 적당한 혹은 그보다 더 낮은 단계의 콘텐츠는 즐길 수 없다. 거기에 차별과 혐오가 일상인 극우화 시대에 정치색까지 다르면 좋자고 하는 관계가 더 피곤해질 뿐이다. 나이가 어릴 때는 아직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은데 지갑은 비어 있고 나이 들어서는 어느 정도 아는 것으로 생긴 자기 나름의 기준에 너무 팍팍한 삶까지 겹쳐 지갑과 충돌한다. 결국 어느 때고 현대에 사랑은 돈이 드는 관계이고 나이가 들면 그 비용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머터리얼리스트>는 현대의 사랑이 자본 기반의 관계라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다만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머터리얼리스트>는 과거건 현재건 사랑이 물질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 인류 초기의 원시인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그 감정을 꽃과 같은 물질로 드러내듯 사랑이라는 감정은 다양한 물질로 표현할 수 있다. 꽃이 아니더라도 상대를 향한 키스, 사랑한다는 속삭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이 매칭해 결혼까지 하는 커플의 신부에게 인류 역사상 사랑과 결혼은 단 한 번도 물질주의적이지 않은 적이 없다는 루시의 말도 기억하자. 문제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시대에 사랑의 관계는 사랑을 물질로 표현해 시작하고 유지되기 보다 물질로 감정을 만들어 시작하고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혼정보회사의 매칭 매니저 '루시(다코다 존슨 분)'이 유니콘남 '해리(패드로 파스칼 분)'과 X인 '존(크리스 에반스 분)'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건 해리가 루시에게 서로에게 완벽한 조건을 갖췄으니 가장 완벽한 짝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라. 사랑은 더이상 감정에서부터 시작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관계이다. 모든 것이 고도화된 자본주의 도시 문명에서 시간을 비롯한 모든 것은 자본화되어 있다. 시간당 5달러가 아닌 10달러를 내야 하는 주차장에 대해서 '날강도 같은 놈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자본적 계급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감정을 갖고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소비'해야 가능하다. 그 모든 것을 대충 계산해보면 답은 하나다. 헤어져!
이처럼 자본 기반의 관계인 사랑을 <머터리얼리스트>는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조명한다. 루시가 일하는 결혼정보회사의 매칭 매니저들은 루시와 비슷한 나이의 2, 30대로 보인다. 이들에게 고객은 상품이며 오랜 기간 매칭이 안 되는 이들은 악성 재고와 같다. 매니저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안 하고와 별개로 자본에 의존적인 것을 넘어서 자본과 거의 합일된 듯한 관계인 사랑에서 매칭이 안 되는 이들은 시장에서 상품성이 떨어지는 이들인 것이다. 일례로 매칭 매니저 중 가장 능력 있어서 매칭의 귀재로 여겨지는 루시가 실제로 매칭에 성공한 횟수는 9회로 두 자릿수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회사에서는 누구든 매칭에 성공해 약혼 혹은 결혼까지 하면 축하 파티를 한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악성 재고들을 서로 연결해줬으니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가! 이처럼 인간성의 상실이 당연하듯 발생하는 시장에서 루시를 비롯한 매니저들은 상품의 특징을 정리하듯 고객들의 특징과 요구사항을 정리하며 등급을 매긴다. 하지만 고기 등급 매기듯 고객을 정리해 등급을 매기는 작업은 아무런 도덕적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미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도시 문명과 문명의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그렇게 요구하고 있다. 겉으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찾아 여지껏 짝을 못 찾은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서로가 서로를 가상의 등급을 매기고 평가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아무런 불편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의 사랑이 현대의 사랑인 것이다.
이러한 현대의 사랑을 현실화하기 위해 발로 뛰는 매니저들이 매칭하는 남녀 관계를 보면 어딘가 어긋나 있다. 여성과 남성 모두 외모가 뛰어난 이들을 원하는데 남성은 여성이 어리기를 바라고 여성은 남성이 경제적으로 성공했기를 바란다. 겉으로 보기에 매칭을 원하는 여성들이 남성에게도 외모 기준을 원하는 지점이 있으나 유니콘남 해리가 15cm를 키우는데 2억 7천 달러가 드는 수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가라는 점을 보면 결과적으로 여성들이 남성에게 원하는 외모는 경제력으로 치환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경제력을 갖추기는 쉽지 않기에 현실적으로 외모 기준이 존재하지만 그런 점에서 오히려 경제력은 남성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반면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육체적으로 어리기를 바란다. 자신의 나이가 30대건 40대건 심지어 50대건 상관없다. 아직 사회를 잘 모르고 어리숙한 20대 초반보다 '성숙'한 20대 후반이 자신과 잘 맞다고 말하는 어처구니 없는 지점에서 고려해봤을 때 여성에 대한 남성의 판단 기준은 해결 자체가 불가능하다. 20대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20대여야 하니까. 그것도 관리를 한. 자본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듯한 현대의 사랑에서 상대에 대한 판단 근거부터 남성과 여성 모두 나이가 들면 상품성이 떨어지나 여성은 거의 독신으로 사는 것이 확정이나 다름없다.
인간성의 상실, 성별에 따른 차별적 기준 등 <머터리얼리스트>는 물질로서 표현되는 사랑이 물질 자체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정말 사랑이란 것을 하고 있느냐고. 일각에서는 <머터리얼리스트>에 대해서 가난뱅이 근성의 사랑을 지지하는 것이냐는 비판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비판이 이 영화에 적절한 비판인지 모르겠다. 다만 이러한 비판이 나온 이유는 그만큼 <머터리얼리스트> 저변에 있는 순수성 때문인 듯하다. 전작 <패스트 라이브즈>(2023)에서도 그렇지만 셀린 송 감독에게 순수성 특히 감정의 순수성은 굉장히 중요한 소재이자 콘텐츠의 시작인 듯하다. <머터리얼리스트>도 원시인의 사랑에서 알 수 있듯 사랑의 순수함을 기저에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놓고 시작한다. 해리와 존 사이에서 루시가 보이는 갈등은 감정적 갈등보다 물질과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성적 갈등에 가깝다. 해리가 신장 수술을 했다는 사실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 2억 7천이라는 수술 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그의 재력이 더 눈에 들어왔고 그래서 감정적으로 끌렸다는 루시의 말을 기억하자. 즉, 루시가 해리 대신 존을 선택하는 것은 물질과 구분할 수 없는 사랑 대신 물질로라도 표현하고 싶은 사랑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이 서사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인위적 선택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리고 <머터리얼리스트>에서 보이듯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이른바 현실이라는 것에 너무나 절여져 루시의 선택을 마냥 긍정할 수 없다. 미래가 불투명한 존을 선택한 것은 안 그래도 불투명한 미래의 불에 기름을 부어 불투명성과 불안을 견뎌야 하는 상황에 처해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머터리얼리스트>는 감정적 영화 같으나 지극히 이성적인 영화이며 굉장히 순수해 현실도 잘 모르는 감독이 자기 좋을대로 만든 영화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머터리얼리스트>는 너무나 원론적이라 순수하게만 느껴지는 그 진리,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상대를 향한 감정에 집중할 것을 모든 것이 자본화되어 사랑마저도 물질이 되어버린 현대에 부르짖는 혁명의 영화이다. 루시의 선택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된다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정언 명령으로 뒤통수에 던지는 강속의 직구 영화이다. 이건 성별을 떠나 생각해야 한다. 자본적 기준에 맞춰 서로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본적 기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쳐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대학교에서는 연애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실제로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필자가 대학생일 때만 해도 그렇게 피하라고 하는 CC를 심심찮게 봤고 학교를 오고가는 커플들도 많이 봤는데... 아마 인구수 감소와 함께 비율상 계속해서 연애를 하는 이들의 수가 줄고 있다는 의미인 듯하며 그래서 더 피부로 와닿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어느 때고 사랑하기 안 좋은 때가 없고 그 중 20대는 사랑하기 가장 좋은 때가 아닌가. 하지만 된장녀를 지나 이대남, 퐁퐁남, 취집과 같은 혐오 표현이 20대 대학생들 혹은 커플들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혐오 표현이 쓰인 콘텐츠가 매일 같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작해 SNS로 퍼지는 시대. 이런 시대에 <머터리얼리스트>의 혁명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으나 적어도 이런 직구 같은 시도만이 아니라 몽둥이 같은 시도까지 계속 되어 뒤통수를 강타해줬으면 한다. 사랑하기 좋은 때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