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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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처와 절망을 딛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자유의 반대(4.0)
올해로 17회를 맞이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DMZ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 DMZ IDFF)는 이름만 귀동냥으로 들었을 뿐 실제로 영화제에 와 영화를 본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심지어 처음부터 개막식에 개막작 상영까지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개막식은 파주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본격적인 영화제는 고양시와 파주시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영화도 다큐멘터리 장르로 평소 많이 접해보지 못해 어렵게 느껴지다 보니 더욱 멀게만 느껴진 영화제라 영화를 보러 버스에 올라탈 때면 조금 얼떨떨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개막식을 보러 평화누리공원까지 갔을 때도 '와, 넓다'하면서도 '집에 갈 때 미아가 되지 않을까?'하는 상상까지도 했으니 고양시로 가는 버스에서의 감정은 별거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살고 싶은 하루'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번 제17회 DMZ IDFF는 준비되지 않았기에 더 크게 와닿는 영화제로 기억될 듯하다. 그 첫 시작인 개막작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Mr. Nobody Against Putin)>은 살고 싶은 하루를 살 수 없는 이들의 바람을 유쾌함과 절망감이라는 상반된 감정의 역동성으로 그려낸 영화로 기억할 듯하다.
드러가기에 앞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를 잠시 정리해볼까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날 것 그대로'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현실 그 자체를 포착해 구성하는 서사 때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크게 3개의 편집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의 편집, 렌즈를 통한 시각과 시점의 편집, 관객의 인식에 따른 편집이 그것이다. 이러한 3가지 편집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영화라고 인식하는 영상은 '만들어진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기에 관객은 영화와 거리를 둘 수 있다. 어떤 영화에 관객이 아무리 몰입한다고 해도 그 영화가 실제가 아닌 가짜라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있기에 영화를 본 뒤 감정을 분출한 뒤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는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포착하기에 관객이 상대적으로 영화와 더 가깝게 위치하게 된다. 관객이 영화와 관찰자로서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체험자, 심하면 무력한 방관자로서 관계를 맺게 되는 듯하다. 체험자 혹은 무력한 방관자인 관객은 스크린의 광경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 현실이라는 사실, 적어도 어떤 누군가의 실제 현실임을 인지하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도덕적 감정에 압박을 받는다. 관객 입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는 단편적인 재미의 의미에서 재미가 없어 힘든 것도 있으나 현실이란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시각적 고문을 당한다고 느껴 다큐멘터리 영화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듯하다.
이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다큐멘터리 영화 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사랑하는 고향과 학교가 점차 무너지는 현장을 기록한 파벨 탈란킨의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다큐멘터리 영화이기에 느껴질 수 있는 장애물이 조금은 희석된 영화인 듯하다. 물론 영화에서 장애물이 희석된 이유 중에는 영화의 배경인 카라바시(Karabash)가 전쟁의 여파가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인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적 특성보다 파벨 탈란킨 감독 본인의 인물성과 공간에 대한 애정이 다큐멘터리 영화라 갖게 되는 장애물을 희석한 듯하다. 파벨 탈란킨 본인, 고향과 학교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러시아라는 국가에 대해 흔히 갖게 되는 편견을 뒤집는다. 푸틴 대통령이 장기 독재를 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로 알고 있는 러시아는 푸틴, 상남자, 보드카, 미국과 라이벌, 시베리아, 횡단열차, 모스크바,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등 관객에게 정보가 제한적이고 단편적인 국가이다. 특히나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고려하면 관객이 러시아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는 사실상 없다. 그런 가운데 영화는 알려진 것이라고는 도시의 기반 산업의 영향으로 심각한 오염을 겪어 황량할 뿐만 아니라 알려지기를 가장 우울한 도시로 알려진 카라바시를 유쾌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시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파벨 탈란킨 본인으로 점차 좁혀지며 소개하는 영화의 흐름 속에서 관객은 원래 갖고 있던 인식, 소개되는 정보와 다르게 학생들을 비롯한 러시아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저 사람 사는 곳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객의 인상에는 영화 전반의 연출과 파벨 탈란킨 감독의 이미지가 주효했을 듯하다. 인물, 지명 등의 명칭을 마치 공책의 메모처럼 적는 연출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도록 한다. 카라바시와 주변 환경, 자신의 학교, 주변인 등을 마치 공책을 찢어서 본인의 손글씨로 적어서 관객에게 소개하는 방식은 고향과 주변인들에 대한 애정을 깊이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탈란킨 감독의 이미지는 한국에서 흔히 너드남으로 일컬어지는 이미지로 그려지는 듯하다. 러시아를 탈출해 서구권으로 망명하는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도입부를 통해서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무거운 정치 다큐멘터리 영화로 다가온다. 하지만 감독 본인을 어린 시절부터 별났고 그래서 어느 정도 따돌림도 당했으며 그럼에도 고향의 학교 선생님으로 학생들과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명명해 관객이 영화이자 현실인 세계에 안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연출을 통해 관객은 본래라면 특별할 것 없는 보통사람이 전쟁이라는 국가적 사태로 고향과 주변인들이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에 당연하지만 당연할 수 없는 민주적 분노와 행동을 보이는 변화를 감정적이되 멜로드라마스럽지는 않게, 이성적이되 지나치게 사유적이지는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객의 반응에는 카메라의 시선이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시선은 보통 탈란킨 감독의 시선이다. 그런데 정부의 방침에 따른 학교의 변화상을 찍는 탈란킨 감독의 카메라는 그가 찍는 대상이 편안하게 정면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초등학생을 찍을 때면 아이의 시선과 카메라의 렌즈가 동등한 위치에 있도록 하는 것처럼 탈란킨 감독의 카메라는 대상이 위를 바라보도록 찍지 않고 최소한 동등한 위치에 혹은 그보다 더 아래에서 찍으려고 한다. 탈란킨 감독 본인의 소회를 담을 때도, 즉 카메라의 시선이 스크린 바깥의 관객과 일치할 때도 그는 자신의 시선과 동일한 위치에 있다. 다르게 말하면 탈란킨 감독의 카메라는 관객과 동일한 위치에서 카라바시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실상을 보통사람의 눈으로 보고 느끼기를 바란다. 자신이 사랑하는 러시아가 자신에게만 미쳐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평범한 타인들이 함께 보고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듯이.
영화는 어쩌면 교사로서 마지막일지도 모를 제자들의 졸업식 축사를 전한 탈란킨 감독이 러시아를 탈출하는 것으로 끝난다. 학생들에게 그는 제자들에게 적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갖기를 바란다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뿐이라고 전하며 졸업을 축하한다. 극우화와 혐오의 시대에서 험난한 현실을 이해하며 살아야 하는 보통사람들에게 탈란킨 감독의 축사는 단순히 졸업생들만이 아니라 스크린 바깥의 관객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탈란킨 감독의 축사를 들으며 문득 탈란킨 감독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만약, 정말 만약 그가 사랑하는 조국 러시아로, 모든 것을 애정하는 고향 카라바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조국의 땅을, 고향의 땅을 밟은 감독은 무엇을 가장 처음 해보고 싶을까? 보통사람 중 한 명인 탈란킨 감독의 답은 무엇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