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BIFF 2일차. 아르토의 땅에서.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개인의 정체성과 전쟁의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다(3.0)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아시아영화의 창' 섹션 영화이자 마지막으로 본 영화이다. 확실히 영화제에서 영화를 볼 것이라면 주말 일요일부터 그 다음주 평일까지 있어야 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상 불가능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아쉬운 마음과 별개로 <아르토의 땅에서>는 개인의 정체성과 국가의 분쟁을 연결하면서 분쟁의 비극을 극대화하려는 영화이나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정체성과 분쟁 사이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 영화였다. 영화는 아내 '셀린(카미유 코탱 분)'이 자살한 남편 아르토의 고국인 아르메니아에서 그의 과거를 알게 되는 전반부와 셀린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분쟁 지역으로 가는 여정을 담은 후반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중 전반부는 셀린이 아이들에게 남편의 기억과 흔적을 남기기 위해 아이들이 국적을 선택할 수 있도록 남편 아르토의 출생증명서를 찾으러 아르메니아를 방문해 남편의 과거를 알게 되는 과정을 미스터리 서사로 풀어내며 긴장감을 선사한다. 성이 다른 남편의 동명이인이 있다는 사실부터 시작해 바로 그 동명이인이 남편이며 남편이 자신에게 성을 속였다는 사실을 거쳐 그 이유가 과거 아르메니아군으로 분쟁에 참여했다가 전투 중 불찰로 자신의 소대원 전원을 죽게 만든 후 탈영한 군인이라는 사실까지. 전반부의 미스터리 서사만으로도 아르토의 정체성에서 아르메니아가 겪고 있는 비극이 느껴진다.
문제는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지점부터 영화가 흔들리는 듯하다. 셀린을 분쟁 지역으로 안내하는 현지 여행가이드 '아르신(자르 아미르 에브라히미 분)'과 셀린이 호텔에서 만나 동행하게 되는 과정은 묘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남편의 과거에 대해 더 명확히 알고 싶다는 셀린의 욕망과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증오와 민병대로 저항 중인 아버지와 연인을 둔 아르신의 현실이 만나 융합되는 과정이 감정적으로 적절하게 적층된 것이 아니라 호텔에서의 우연한 하룻밤 만남 속에서 몇 마디 말로 넘어간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처음 본 프랑스인 즉, 외부인인 셀린을 아르신이 믿게 되는 과정은 여성 연대라는 틀만으로 구성된 것처럼 느껴져 영화의 서사가 급격하게 흔들리는 느낌이다. 특히나 미스터리 서사를 거치며 남편의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셀린이 이미 남편이 숨긴 과거의 진실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상태에서 다시 진실을 찾아 분쟁 지역으로 간다는 것이 마치 여정이 끝난 뒤 바로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는 고된 느낌을 줘 거칠게 말하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후반부의 여정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에서 영화의 후반부는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아르메니아 국민들의 증오와 분쟁 중에도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강인한 삶을 포착한다. 분쟁 지역을 향해 나아가는 로드 트립의 과정은 전반부의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달리 전쟁 한복판의 현장감을 포착하려는 다큐멘터리적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전반부가 남편의 과거를 마주하는 셀린의 감정과 반응 즉, 개인의 변화에 집중한다면 후반부는 그와 정반대로 아르메니아라는 국가, 저항과 고통의 연속인 삶을 살아가는 아르메니아인이라는 공동체에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지점이 서사적으로 두텁지 않다보니 후반부의 시점과 중점의 변화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게다가 앞서 남편 아르토의 정체성에서 엿보이는 아르메니아의 비극이 전면으로 부각되는 것은 어느 정도 엿보였으되 잘 알지 못했던 현실이 전면화되는 것이다. 관객은 잘 알지 못했던 아르메니아의 현실을 현실의 자극을 무자극으로 포착하는 다큐멘터리의 시선으로 보게 되면서 다큐멘터리적 긴장감이라고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서사의 문법 속에서 영화의 시선을 놓치게 되는 듯하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르토의 땅에서> 감독 타마라 스테파냔 감독은 아르메니아 출신 프랑스인이라고 하지만 아르메니아 태생이자 아제르바이잔과 분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12살의 나이에 이민을 떠난 감독이다. 인터뷰에서 "모든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거쳐야만 극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감독의 신조에서 봤을 때 <아르토의 땅에서>는 감독 본인의 개인적 경험과 본인의 신조가 각각 전반부와 후반부에 드러나는 영화로 사료된다. 타마라 스테파냔 감독만의 시도와 연출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는 더 두고봐야 할 것이다. 다만 <아르토의 땅에서>는 개인의 경험과 공동체 전체의 인식을 연결하는 지점이 매끄럽다고 느껴지지는 않기에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