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이 주연다울 때

이태원. 삐삣버거(Pipit Burger). 삐삣버거&프렌치프라이즈.

by Gozetto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연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빛나는 조연 배우를 주연급 조연이라고 한다. 사실 TV 드라마나 영화의 주연보다 빛나는 주연급 조연은 속담으로 치면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식에서도 배보다 큰 배꼽, 즉 조연 재료가 주연 재료보다 빛나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인다. 델리만쥬는 가장 극단적으로 조연이 주연보다 잘 나가는 경우이다. 주연이라 할 수 있는 빵보다 조연인 커스타드 크림과 향기가 사실상 주연이니 말이다. 델리만쥬와 같은 극단적인 예시 말고도 주연 재료보다 조연 재료가 빛나는 경우는 의외로 많은데 햄버거가 그러한 경우이다.

햄버거에서 주연이라 할 수 있는 재료는 단연 소고기 패티라 할 것이다. 그릴 위에서 구워진 소고기 패티는 육즙도 육즙이지만 구워졌을 때 치고 올라오는 육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햄버거는 패티의 육향을 즐기는 음식인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패티가 홀로 주목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치즈가 되었건, 소스가 되었건, 볶은 양파가 되었건, 하다못해 버터를 발라 구운 번이 되었건 패티는 다른 재료의 도움을 받아야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아예 다른 재료들에 가려져서 소고기 패티의 매력이 하나도 안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주연 재료가 주연답기가 이렇게 어렵다.

굳이 패티가 드러나야 할 필요는 없기는 하다. 다른 재료들과 조화를 이룰 때 가장 맛있는 버거가 탄생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재료 중 가장 높은 원가를 차지하고 있는 패티가 아무런 색깔도 드러내지 못한다면 버거와 샌드위치의 차이는 무엇이며, 왜 버거를 먹으면서 7, 8천원 이상을 지불해야 하는가? 패티가 육즙이 됐든, 육향이 됐든, 가장 이상적이게 육즙과 육향 모두든 자기 색깔을 드러낼 수 있어야 주연답고 소비자도 가장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태원 삐삣버거(Pipit Burger)의 삐삣버거는 주연인 패티가 육즙과 육향을 뿜뿜하며 주연다운 버거다.

혀가 낼름 나와 있듯 거대한 베이컨이 먼저 눈에 띤다. 패티를 감싸고 있는, 물결치는 노란 치즈도 눈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보면 여느 버거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버거라는 것 이외에 다른 기대감은 하나도 없이 슬쩍 베어 무는 순간, 패티의 육향이 입천장을 타고 코를 강타한다. 그릴에 구워져 눋어야 나는 불향과 소고기 기름의 고소한 향. 두 향이 입과 코를 가득 채워 미간이 맛있음으로 채워지며 찌푸려진다. 소고기 기름에 물결치는 치즈가 더해져 쥬시한 육즙과 베이컨의 짭짤한 맛은 덤이다. 베어 무는 족족 패티의 육향이 폭발한다. 베이컨, 양상추, 양파, 치즈, 사우전드 아일랜드 소스까지 모두 패티의 육향을 보조할 뿐이다.

감자튀김은 감자 하나가 튀겨진 것처럼 감자향이 진하다. 막 튀겨져 나와 바삭하면서 포슬포슬한 가운데 고소한 흙내음(?)과 같은 감자향이 뿜어져 나온다. 두께도 두텁다 보니 감자향도 다른 곳에서 먹은 감자튀김보다 더 진하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를 먹어도 감자 하나를 먹은 것처럼 든든하다. 소금도 꽤 짭짤하게 뿌려져 두터운 두께에 케첩이나 마요네즈를 찍어 먹지 않아도 소금의 단짠한 맛이 쫘악 올라온다. 개인적으로는 후추까지 뿌려지면 금상첨화일 듯하다. 심지어 한 판을 다 먹어도 리필이 되니 가격도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감자튀김을 먹는데도 입 안에 남아 있는 육향이라니... 패티가 주연 노릇 제대로 한다.

주연급 조연들은 색다른 매력으로 주연을 돋보이게 하기도 하고 극의 서사를 풍성하게 만들기도 하며 관객이 극에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주연급 조연들이 주연보다 너무 잘 보이는 순간 극 자체의 매력은 반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어느 역할이나 마찬가지지만 주연은 자기 영역과 색깔이 명확해야 한다. 안 그러면 조연들에게 먹혀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버거의 패티도 마찬가지다. 버거를 먹다 보면 패티가 가장 많은 재료값을 차지하는 반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꽤 있다. 소고기 가격이 비싼 한국에서 패티를 두껍게 하는 건 쉽지 않아서 그런 건가 싶다. 그렇기에 패티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이 시도된다. 이 가운데 육향은 다른 재료들에 묻히고 결국 이도저도 아닌 햄버거가 되곤 한다. 육향이 없어도 매력적일 수 있지만 길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뭘 주연으로 삼느냐 보다 주연을 어떻게 돋보일 수 있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