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다가오는 삶에 대한 갈망

뮤지컬 <시지프스>를 보고

by 북두칠성


영상에는 결코 담기지 않는 카타르시스

영상에는 결코 담기지 않는 것이 있다. 두 눈과 귀, 피부에 와닿는 강렬하고 짜릿한 에너지다.

공연은 반드시 직접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여실히 느끼게 해준 극. 바로 <시지프스>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산 정상까지 바위를 밀어올리고, 다시 반대편으로 떨어진 바위를 밀어올리는 괴로운 노동을 영원히 해야 하는 형벌에 처해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시지프스'와 알베르 카뮈의 동명 소설 <이방인>의 골자를 차용한 이 극은 현장에서 봐야만 온몸으로 감동과 교훈과 전율, 그리고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무대 위 배우들의 과장된 모션과 격정적인 움직임은 자칫 오글거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절망을 이겨내는 힘이 정적인 희망이 아니라 몸을 던지는 역동성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 연출적 선택은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언노운(unknown)' 모든 인간에 대한 투영

전쟁과 팬데믹이 모든 것을 초토화시킨 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같은 현실. 네 명의 배우는 무대라는 세계 위에 <이방인>을 다시 그려내며, 삶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작중 주인공 뫼르소 역을 맡아 연기하는 캐릭터의 이름은 '언노운(unknown)'이다. '알 수 없는'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이름으로 갖는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행위를 반복하는 이 이야기가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가 자신만의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은유이다.


산 정상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를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태양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뫼르소. 이 두 인물은 서로를 비추며 겹쳐진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하루를 견뎌내는 모든 관객은, 어느 순간 무대 위 뫼르소에게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반원 형태의 뒷면 스크린은 태양처럼 붉게 타오르기도, 파도처럼 일렁이기도 한다. 이는 뫼르소가 끝내 외면하려 하지만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의 구체적 형상이다.



죽음을 직면할 때 비로소 피어나는 삶에 대한 갈망

어머니의 장례식 전날까지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햇빛이 너무 뜨거워 눈이 부셨다는 이유로 총을 쏴 사람을 죽인 뒤 살인죄로 감옥에 갇히고, 끝내 사형을 선고받은 뫼르소.


감정의 동요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던 그는, 죽음이 실체로 다가오자 비로소 두려움에 잠식된다.

늘 반원에 머물던 태양은 벽면 전체를 덮으며 내려오고,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운명을 시각적으로 체감케 만든다. 그제야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느꼈던 무력감과 회의감의 정체는 죽음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외면해왔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죽음이 자신을 뒤덮어버리고 더 이상 피할 곳 따윈 없는 상황이 되자, 반쯤 미쳐버린 듯한 얼굴로 눈물과 땀, 콧물과 침을 흘리며 그는 외친다. 용서 따위는 원하지 않는다. 그저, 살고 싶다고. 그리고 뜨겁고 가혹한 운명을 향해 온몸으로 달려 나간다. 죽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에야 아무 의욕도 없던 한 청년은 진심으로 삶을 갈구하게 되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질 용기

모든 인간의 종착지는 죽음이다. 우리는 모두 사형수다. 이 사실은 잔인하고 비극적이다.

그러나 끝이 존재한다는 가혹한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죽음을 인정하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삶은 의미를 획득한다. 본인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온전히 인정하고 어깨와 발목이 으스러질 듯 아프더라도 꿋꿋하게 바위를 굴려내야만 한다.


결말을 알면서도 묵묵히 걸어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되,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것. 흐느끼고, 좌절하고, 이별하고, 아파하고, 울고, 웃으며 그럼에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만이 진정으로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삶이다.


시지프스가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듯,

우리 역시 오늘을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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