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게 아침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 차 안이었습니다. 핸드폰이 없어 아이는 제 핸드폰으로 친구와 연락합니다. 일요일 점심 먹고 만나기로 한 친구가 심심하다며 빨리 만나자고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묻지 않고 알겠다고 하자 신랑이 화가 났습니다. 저는 아이가 통화하는데 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었습니다. 신랑의 요지는 친구와 약속 잡는 것은 좋으나 점심 먹고 만나기로 하였으니 점심 먹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부모에게 묻지 않고 마음대로 약속 시간을 당긴 것은 문제라는 것이죠. 심지어 저희 집에서 놀기로 했는데 말이죠. 그럴 경우 부모에게 시간을 당겨서 만나도 되는지 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아이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아이가 친구랑 약속을 스스로 잡는데 아이들 의견이 중요하지 않냐, 왜 아이가 눈치 보게 통화 중에 큰 소리를 내느냐 했습니다. 우리의 분란은 아이 친구의 전화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엄마가 밥 먹고 나가야 한데. 1시에 보자."
우리의 문제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아이가 타인의 '눈치'보지 않고 아이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선택하게 하고 아이의 결정을 따라 주었습니다.남들 눈치 보느라 어떤 선택도 못하고 "아무거나요."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야 자신이 먹을 음식, 볼 책, 입을 옷을 선택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늘어났습니다. 주변상황을 살피고 '눈치'를 보고 배려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그런데 저는 여전히 어린아이 대하듯 아이의 선택을 다 따라주려고 했습니다. 신랑은 저와 아이의 그 지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눈치'라고 말하지만 사실 '배려'가 없음을요.
한마디로 눈치는 보지 말되, 눈치 있게는 살아야 한다. - 어른의 재미, 진영호(클레이 하우스, 2023)
고백하건대 제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책을 보고야 알게 되었습니다.(원래 가족 말은 안 듣는 것은 국룰이니까요;;) 눈치 보는 것과 눈치 있게 사는 것이 다르다는 것. 아이가 '눈치'보지 않는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 '배려'없는 선택 할 때조차 옳다고 해주었다는 것.
결국 눈치 없이 살다가 눈치 보는 성인으로 자라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배려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과 사랑하지도 않고 친구를 하지도 않고 직원으로 쓰지도 않고 배움을 주지도 않으니까요. 오직 부모만 그럼에도 사랑하겠죠. 그럼 세상에서 고립되어 부모한테나 큰소리치는 성인이 될 수도 있겠죠.